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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아빠 Nov 17. 2022

게으른 아빠의 정원일기  #18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가을 정원은 나무 심기에 최적이다. 하지만 이 말은 자신이 직접 나무를 심어보기 전까지는 맞는 말이다.


10월 29일,  11월 5일


평일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휴일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나무를 심었다.

정원 둘레에 담장을 쌓지 않고 나무로 생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사철 푸르른 사철나무 200주를 심기로 했다.

먼저 심기 전에 부지 출입구 쪽과 대나무가 있는 위쪽을 제외한 아래쪽과 건너편 가장자리에 삽으로 고랑을 파는 작업을 하였다. 고랑을 판 후에 일정한 간격으로 두줄로 맞추어 심고 물을 주고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나중에 곡괭이, 괭이, 쇠스랑 등 필요한 농기구를 더 구입하긴 했지만 일을 만만히 보고 삽 한 자루로 고랑을 일일이 깊게 파서 심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었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뼈마디와 근육이 아팠다.


막노동하듯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결국 우리 몸을 떠나서 노동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들은 몸의 언어이다. 일이 힘이 들수록 우리의 몸은 자신을 정직하고 극명하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드러내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이 현재의 자신에 오롯이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나의 몸에 집중하라. 나의 지금에 집중하라. 카르페디엠(Carpe diem)의 진정한 의미를 힘든 일을 하는 나의 몸에서 발견한다.


* 카르페디엠(Carpe diem)

  : 호라티우스의 시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

 -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년 ~BC 8년)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        


11월 6일, 11월 13일

봄에 꽃이 피는 모란(20주)과 작약(20주)을 심었다.

모란과 작약은 꽃만 놓고 보면 서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모란은 나무줄기에서 꽃이 피고 나무 상태로 겨울을 나지만 작약은 매년 뿌리에서 풀처럼 새로운 줄기가 나와 꽃이 피고 겨울에는 줄기가 말라 없어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약 뿌리)
(모란 식재 후 막대로 표시함)
(마음 한가하면 내가 산을 바라보다가 마음 바쁘면 산이 나를 바라본다. )


이젠 비가 온 후 아침저녁으로 초겨울처럼 쌀쌀하다.

도시에 살다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있다는 정도로 생각이 고정되어 계절이 바뀌는 것에 둔감하다.


밭에 나와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기존의 계절 이외에 각 계절 사이에 미묘하게 존재하는 다른 계절들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환절기 개념이 아니라 시간으로는 짧지만 독특한 느낌으로 나의 몸이 반응하는 계절들이다.


겨울과 봄 사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봄과 여름  사이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여름과 가을 사이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가을과 겨울 사이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같은 것 같지만 같지 않고

경계가 있는 것 같지만 경계가 사라진

어슴프레 모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의 투명한 비눗방울 놀이처럼 섬세한 계절들.


사람사이에도 이러한 계절들이 있다.

확연히 선을 긋고 이편과 저편으로 설 수 없는 어떤 바람의 흔들림 같은 것.

먼 시간을 돌아와 이제야 와닿는 안타깝고 아련한 추억 같은 것.


내 마음들 사이에도 이러한 계절들이 있다.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것.

온몸이 울어야 나오는 눈물 같은 것.


나이를 먹을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약해졌하진 말자.

눈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가을에 가수 최백호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고 노래한다.

지금 모두가 온통 가을로 물들어가는데 이 가을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다시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떠나지 못하고 그리움만 전하겠지.


(우리 집 네 살 아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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