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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Mar 25. 2022

아빠의 자동차,
마이티 2.5톤 트럭과 BMW

아빠의 마지막 차

아빠가 BMW를 샀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신기하다'였다. 솔직히 어릴 때만 하더라도 외제차는 부자들만 타는 차인 줄 알았다. 소위 집에 돈 좀 있고, 부모님 직업이 짱짱한(?) 가족만 타는 차인 줄 알았던 셈이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기에 내 오래된 관념이 꼭 맞지도 않다. 이제는 차가 곧 '부의 상징'도 아니고 하물며 국산차와 외제차의 가격에 엄청난 갭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차를 구매하든 취향이라고 볼 수 있게 됐다. 아마 내가 신기하다는 감정이 든 건 그럼에도 우리 집이 외제차를 살만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빠와 엄마가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빠의 첫 차는 마이티 2.5톤 트럭이었다. 

아직도 그 차를 생각하면 기억나는 게 있다. 내가 7살 때 우리 집은 주방용품 가게를 운영했다. 늘 있던 건 아니지만 항상 어떤 때가 되면 아빠는 영덕까지 마이티를 몰고 물건을 떼러 가곤 했다. 그때 난 사실 차도, 아빠의 일도 관심 없었다. 내게 제일 중요했던 건 아빠를 따라가면 돌아올 때 꼭 7번 국도에 있는 한식뷔페 집을 들러 밥을 사주신다는 거였다. 무슨 메뉴들이 7살의 내 입맛을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딱 한 가지 기억나는 건, 그곳의 감주가 그렇게 맛있었던 것 같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면 돌아오는 도로는 아빠와 함께하는 놀이터였다.

나는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우리 앞에 있는 차들의 이름을 외우고 놀았고, 이 차는 무슨 차이고 저 차는 무슨 차인지 아빠에게 지겹도록 묻곤 했다. 자동차 디자인부터 브랜드와 성능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마이티 안에서 나누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마이티를 몰고 영덕으로 가신다고 하면 어김없이 괜히 그 차를 타고 싶어 했다. 가끔 한식뷔페를 들르지 않는 날은 너무나 슬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도로 위에서 아빠와 보내는 시간은 7살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행복 중에 하나였다. 


시간이 흘러 내가 10살이 되던 해, 아빠는 마이티를 대체할 포터를 사셨다. 마이티가 폐차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친구를 잃는 느낌이었다. 거실에 앉아 폐차 소식이 적힌 어떤 통보문 같은 걸 읽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감정이입을 해 슬퍼한 기억이 있다. 그때 엄마가 날 놀리기도 했다. 마이티 떠나 보내는 게 그렇게 슬프냐며. 이제와 생각이지만 우수에 찬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것 같다. 


포터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와 누나들, 그리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준 고마운 존재였다. 동시에 사춘기 시절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모종의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한 번은 백화점을 갈 일이 있었다. 포터 말고 타고 다니는 자가용 느낌의 차가 우리 집에 한 대 있긴 했지만, 그날은 아빠가 일이 있어 포터를 타고 백화점을 가야 하는 날이었다. 가만히 옆자리에 타고 있던 중학생의 나는 지하주차장을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 고요한 감정에 돌을 던지는 말을 주차장 요원께서 뱉었다. 


"쇼핑하러 오신 거죠?"


남에게 묻지 않는 걸 나에게 묻고,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나에겐 당연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그때 느끼는 감정을 도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 열등감 비슷하면서도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몰려왔다. 우리가 트럭을 타고 있어서, 그래서 당연히 쇼핑을 안 할 것이라 생각했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런 상황이 와도 탈 없이 웃고 넘기겠지만 또 그렇게 물어본 주차요원이 악의를 가졌다고 생각지도 않겠지만 그때는 차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춘기 중학생에게 그런 작은 말도 꽤나 큰 상처로 다가왔다. 7살 때 느낀 아빠의 트럭은 즐거움과 행복이었는데 15살에 느낀 아빠의 트럭은 부끄러움과 분노였던 것이다. 


하루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옆에서 새 차에 신나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니네 아버지, 지금 신났다! 차 새로 샀다고"


처음 아빠가 차를 바꾼다고 했을 때 우스갯소리로 외제차를 사보라고 했다. 아빠와 엄마도 여태 고생을 하셨으니, 어쩌면 생애 마지막 차가 될지도 모르는 차로 번지르르한 외제차를 타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속으론 자식들도 어느 정도 제 앞가림을 하고 있고, 한창 돈이 들어가는 시기는 좀 지났으니 이젠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긴 했다. 그런데 진짜로 외제차를 사고 또 그 사실에 기뻐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뭉클했다. 


언젠가 아빠에게 서운한 적이 있었다.

왜 이렇게 무뚝뚝하고 왜 이렇게 성미가 급하신지 심할 때는 당최 그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워커홀릭처럼 살아가시는 것도 자식의 입장으론 그닥 좋지 않았고 남들 다 하는 그 흔한 영화관과 스키장, 가족여행도 잘 가지 않았었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또 나 역시도 제법 일찍 철이 든 바람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인내했기에 불편해하진 않았지만 서운한 적은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와서 난 좀 더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 

그 시절, 가장 가족과 행복을 누리고 싶었고 남들이 부르는 일상을 만끽하고 싶었던 건 아빠였을 터다. 트럭을 타고 가며 백화점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도 괜히 내 눈치를 본 건 아빠였고, 아들이 못내 친구들에게 놀림받을까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다 주며 미안했을 것도 아빠였다. 아빠가 그토록이나 급한 성격과 일에 중독된 것처럼 일을 한 것도 실은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나의 가족을 챙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 사회를 살며 당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늘어났을 때 가진 그 책임감과 부담감에 더 허리띠를 조여매고 버틴 것이었다. 


사실 어떤 차를 사든 중요치 않았다.

내가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앞으로의 선택은 아빠의 행복을 위해 하시라는 거였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아빠의 삶을 봐왔기에 이젠 아빠의 크고 작은 행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통해 배운 건 나였다. 

아빠의 삶에는 성실함이 있었고 나는 그걸 두 눈으로 지켜봤다. 문득 이제는 빛을 바랜 것 같은 성실함이라는 가치가 오히려 변하지 않는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나도 아빠처럼 꿋꿋이 살아간다면, 또 인생을 길게 보아 조급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조금은 안개 같은 내 앞길을 더 잘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알 길 없는 인생이지만, 아빠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면 나의 삶도 불안과 조급함이 아닌 크고 작은 행복들로 가득 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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