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해외여행은 대만이었다.
현준이와 입대를 앞두고 떠난 여행이었으니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여행을 가기 6개월 전, 기어코 반수를 하겠다며 2학기 기숙사 신청을 하지 않은 터라 혼자 몇 달간 학교 근처 원룸에서 지내야 했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그러겠지만 그때 내 방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한 날은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다 이야기가 나왔다.
"야, 마 우리도 20살인데! 한번 해외여행 가야 되지 않겠나?"
도화선이었다. 제주도 히치하이킹 여행으로 한껏 자신감이 생긴 우리에게 해외여행은 새로운 즐거움과 쾌락, 뭐 그런 거였다. 돈도 없고 정보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가까운 아시아 국가를 여행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택한 곳은 대만이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이 여느 20살처럼 돈 때문에 여행을 취소했다. 사실 나도 그럴 뻔했다. 그때 내가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해봤자 부모님께 용돈 받는 것과 알바가 전부였는데... 하지만 왠지 그러니 더 가고 싶어졌다. 20살의 마지막,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으로 향하기 전에 내 머릿속에 해외여행의 추억을 담고 싶었다.
대만행 왕복 비행기 값은 30만 원이었다.
거기에 게스트하우스 숙박비와 가서 쓸 여비를 생각하니 대략 6박 8일간 100만 원 안쪽의 계산이 나왔다. 현준이가 먼저 숙박비와 항공권을 긁었다. 지금도 내가 현준이를 칭송(?)하는 게 있는데 정말 숙소 찾는 거에는 귀신이다. 아무리 게스트하우스가 저렴하다지만 총 숙박비가 10만 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격만 저렴한 게 아니었다. 시설도 꽤나 좋았다. 6박 중 내가 선택한 곳은 대만 영화에 나오는 스산한 골목이었던 반면, 현준이가 선택한 곳은 정말 여행자들이 쉬는 깔끔한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내려 타이베이로, 우리는 첫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의 거실쯤 되는 공간에 다양한 외국인들과 섞여있었다.(우리도 외국인이지만...) 옆자리에 앉은 낯선 외국인에게 미친 듯이 대화를 걸어보고 싶었던 나와 현준이는 혼자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옆자리 흑인 형에게 말을 건넸다.
"Hi..?"
"Hi!"
"Uhm... nice to meet you, whe.. where are you from?"
"US"
"Oh.. cool!"
"Thank you. Where are you from?"
"Oh! we are from South Korea!"
미국에서 온 '제프리 우드' 형이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이었지만, 다년간 학습된 듣기 능력으로 미국 출신의 제프리 형은 중국에서 동아시아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뭔가 좀 더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서로 영어가 짧아 더 큰 도전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짓과 번역기를 활용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스마트폰으로 뭔갈 열심히 보던 게 눈에 띄었다.
"What are you.. watching now?"
"Oh. Netflix"
"Net.. flix..? What's this?"
그랬다. 우린 그때 넷플릭스 주식을 샀어야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넷플릭스는 서비스가 안 되고 있었고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뭔갈 재밌게 보는데 우린 유튜브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넷플릭스였다니. 여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고는 우리는 과감히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었다.
대만은 상당히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며칠간 맑은 하늘은 드물었다. 타이베이와 근처를 여행하는 때는 더 그랬다. 하루는 지우펀을 여행하는 날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됐다는 거리를 보고 싶었다. 지우펀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리자 정말 비는 오지, 사람은 많지 그게 바로 지옥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데 우산에 치인 수많은 사람들을 셀 수도 없었다. 간혹 옆을 보면 우롱차와 땅콩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는데 땅콩 아이스크림은 한국어로까지 적혀 있었다. 으레 보던 한국의 관광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그 사진으로만 보던 거리가 어딘지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한참을 돌고 돌아 결국 포기하려던 그때, 뭔가 우리의 발을 자연스레 이끌던 골목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왠지 우리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직감이 들었다. 계단을 조금 오르내리자 두 눈에 나타났다. 바로 그곳이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그곳. 단숨에 좋아진 기분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사진을 예쁘게 못 찍은 이유도 있겠다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좁은 골목에서 우산과 부딪혔기에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생각보다 별 것 없는 장소의 느낌이 허망한 기분이었다. 오히려 그 장소를 찾기 위해 지우펀의 골목골목을 헤매던 노력이 더 즐거운 느낌이었다. 우산에 부딪히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먹은 소시지와 우롱차, 여기가 맞는지 저기가 맞는지 돌아다니며 넘어지던 그게 뭔가 좀 더 재밌었다. 그런 여정은 꼭 지우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단수이에서도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중학교를 찾아다녔지만 막상 길을 나서면 그 목적지보다는 목적지를 찾는 지하철과 길거리가 더 큰 만족을 주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단지 친구와 이야기하며 새롭고 낯선 곳에서의 여정 자체를 즐긴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대만 3대 비경 중 두 군데라던데?"
대만을 여행하기 전 현준이가 아리산과, 일월담 여행을 제안했다.
낯선 곳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무슨 병이 도졌는지 남들 다 가는 타이베이에서의 여행이 아닌 낯설고 잘 안 가는 그런 곳에서의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당연히 그곳에도 대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일월담과 아리산을 가기 위해선 타이중으로 가야 했다.
타이중의 숙소는 내가 골랐다. 후에 이야기지만 정말 그때 우린 장기가 털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숙소로 찍힌 곳을 구글맵을 보며 가는데 가면 갈수록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한자가 분명 힙해 보였는데 어느 순간, 스릴러물의 영화 배경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숙소에 도착했지만...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묵는 숙소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웬 신발이 옆에 있지 했는데 우리가 자는 침대 옆 쪽으로 또 다른 투숙객이 있던 거였다. 남들이 보기엔 키 180의 남자 두 명이 더 무섭겠지만, 정말 그때는 이렇게 대만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때의 교훈 덕분인지 이후론 덜컥 싸다고 숙소를 예약하는 일은 적어졌다.
타이중에는 펑지아 야시장이 있다.
사실 타이베이에서도 그렇고 타이중에서도 그렇고 대만을 잘 모르는 우리에게 두 도시 야시장의 큰 차이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냥 분위기. 딱 그거였다.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펑지아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우리가 뭘 먹으려 했던 건진 모르겠다. 뭔가 떡 비슷한 거였는데 길을 걷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 음식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걸 사기 위해 아저씨께 '영어'로 질문했다.
"Excuse me, What is the best menu?"
"???"
"Uh.. What is the... Number one?"
"?????"
낭패였다.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셨다. '베스트 메뉴'에서 이미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던지시는 아저씨께 우리는 아무런 요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아무거나 사 먹어야 하나 싶던 순간, 뒤에서 모국어 같은 영어가 들렸다.
"May I help you?"
어떤 대학생 남자였다.
다행히도 펑지아 야시장은 근처에 대학을 끼고 있어 우리로 치면 홍대 안에 야시장이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거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가장 기본적인 메뉴를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이런 게 현지인이구나 싶은 중국어로 아저씨께 이야기를 건넸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우리와 다르게 주문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주문한 음식을 받으며 우리는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친구 몇 명과 함께 있어 보였는데 우리를 도와주고는 훌쩍 자기 친구들과 웃으며 갈 길을 떠났다.
어쩌면 여행의 숨은 묘미란 이런 걸 지도 모르겠다.
낯선 환경에 떨어진 나에게 모든 것은 위험해 보이고 경계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그곳의 사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겐 익숙한 모든 게, 누군가에겐 새로운 호기심이 되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여행의 소소한 즐거움 아닐까. 여행지의 궁금함이 뒤섞이고 여행을 하는 이와 그곳에 사는 이의 삶이 우연찮게 맞닥뜨리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대만을 간직할 수 있었다.
일월담과 아리산으로 향하는 여정에 들른 타이중.
그곳에서 현준이와 나는 잊을 수 없는 그 여자애를 만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대만 (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