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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소장 Sep 17. 2020

성남, 성남구도심

이것이 진짜 부동산 투자다 36부

성남 구도심

성남 구도심이라는 표현으로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지역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성남시 중 주목하는 지역을 지도로 표시해놨다.



설명하면서 구도심이라고 써 놓은 이유는 행정구역상 성남시와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성남시라 하면 판교와 분당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부동산투자에서는 판교와 분당을 별개로 보고 성남이라 칭하는 위와 같은 구도심도 별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구도심의 명칭을 사용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인터넷에서 지도를 열어서 보시면 성남의 입지에 대해 놀라실 것이다. 굉장히 좋다. 위례 신도시와 거의 연접하고 있고, 물리적 거리를 기준으로 한 서울 및 강남접근성은 판교와 분당보다 오히려 좋다. 그런데 가격은 최근 올랐다고는 해도 아직 판교는 커녕 분당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성담구도심은 주목할만하다. 이곳이 위치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떨어지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개발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개발을 요즘 열심히 하고 있다. 성남은 상당히 많은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규모도 굵직하다. 이런 대단지 아파트들이 입주하기 시작하면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솔직히 ‘성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좋지는 않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좀 못 사는 동네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덕도 심하고 분위기 역시 그러했다.



연세가 지긋하신 독자분들이나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잘 아실테지만 성남은 서울 청계천 부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강제이주시킨 곳이다. 배경을 조금 살펴보면 특히 1950년 한국전쟁 (6.25) 전쟁 초기 부산 지역을 제외하고는 북한군에 속절 없이 밀렸기에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의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을 짓고 피난살이를 하였다. 필자가 1997년 대학교 1학년 때 부산에 친구가 있어 친구들과 놀러갔는데 그 친구 집이 산 중턱에 있어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집이야 90년대 당시의 다른 집과 다를 바 없었지만 산에 빼곡이 집이 있던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그 집들이 50년대 당시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오랜 후 휴전을 하게 되었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은 집을 잃거나 월남을 한 북한사람들이 거주할 곳이 없어 빈땅에 천막이나 움막 등을 세우면서 살았다. 



60년대가 되면서 우리나라는 정부 정책에 의한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취한 전략이 수출주도성장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내수시장이 매우 적었으므로 당연한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수출위주 성장정책을 펴기 위해서 기술이 없는 우리로서는 저가 전략을 써야했고, 저가 전략을 위해서 원가를 줄여야 했기에 저임금 정책을 하였다. 저임금이면서도 국민들의 불만을 얻지 않으려면 생활물품에 대해서도 가격을 인하하면 된다. 즉 10,000원 월급 받는데 한 달 쌀값이 1,000원 정도라고 해보자. 그런데 급여를 5,000원으로 줄였다. 당장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런데 쌀값도 정책적으로 500원으로 낮췄다면 어차피 식료품에 들어가는 월급 대비 비율이 비슷하니 큰 불만이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수가 작은 우리는 수출주도 성장을 해야만 했고, 기술이 없으니 저가 전략을 해야 했고, 저가 전략을 위해 저임금 정책을 써야했으며 저임금 정책을 위해 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의 저가정책을 단행했다.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 누가 힘들까? 당연히 농민이 힘들다. 농민들은 돈 안 되는 농사를 접고 서울로 이농[離農]했다. 이른바 이촌향도 현상이다. 이렇게 올라온 이농민의 수는 서울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작정 상경한 것이므로 집도 돈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울의 하천이나 산기슭에 무허가로 집을 지어 살았다. 판자촌이다. 



이렇게 판자촌이 커진 곳은 달동네라고 불렸고, 서울의 산 곳곳에 판자촌이 즐비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이들은 멸시를 받아야 했고 정부 역시 이들을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았는지 혹은 외면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이 곳을 철거하면서 집단 이주를 시킨 곳이 바로 지금의 성남시이다. 이 때가 60년대 중후반 경이었는데 지금처럼 행정절차에 의해 정중하게 통보하고 보상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군사정권으로서 어느 날 갑자기 철거반이라는 완장을 찬 남자 수십명이 트럭을 타고 와 무작정 때려 부수는 것이다. 당시의 집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대충 지은 집이라 해머질 몇 번이면 그냥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항의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수년간 철거반이 집을 부쉈지만 사람들은 어딘가에 가서 다시 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 살기 위해서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니 정부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고 해결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정책이 서울 외곽으로, 경기도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성남에 가보면 주택들이 전부 대지 20평 전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서울시가 이들에게 이 정도 평수가 쪼개어 분양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빈민이 되어버린 이농민들에게 당시의 광주군 중부면 일대 (현재의 성남시)에 대규모 택지 개발을 하겠다고 했고 신청서를 받았다. 이에 약 15만명의 사람들이 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으나 실상 상권이나 편의시설은 전혀 없었고 심지어 기본적인 인프라인 상하수도 시설조차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금만 그어놓고 천막 하나만 제공되었다. 이렇게 이 곳은 또 다른 거대 빈민촌이 되었다. 이후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성남시로 승격할 것을 약속하고 실제로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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