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껍질 교육과 솜사탕 교육 vs. 동료 상호작용
강사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수박껍질 교육과 솜사탕 교육이라는 함정입니다.
첫 번째 함정인 수박껍질 교육은 우선순위도 목적도 불분명한 피상적 설명식(coverage-focused) 강의를 말합니다.
마치 진도를 나가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 마냥 강사는 열심히 진도를 나가고 학습자들은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수업이죠. 학창 시절 다들 경험해보았을 수업 방식입니다. 실제적인 내용보다는 피상적인 학습에 머무르는 것이 마치 수박 겉을 핥는 것 같아 저는 이런 교육을 수박껍질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강의 현장에서 수동적인 청중으로 참여한 (심지어 몇몇은 끌려온) 참가자들에게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강의를 한 번이라도 해본 분이라면 이 지점에서 매우 크게 공감할 것 같습니다.
참가자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일은 학습자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훈련된 노하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강사들이 참여를 몇 번 유도해보다 생각처럼 잘 되지 않으면 가장 익숙한 강의방법, 즉 일방적인 설명식 강의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죠.
또는 내가 가르쳐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가르치고 강조하면 학습자들이 잘 알게 될 것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착각’이 더해진 강사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르친 것은 학습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분들이죠. 이런 분들은 ‘내가’ 가르쳐야 할 소중한 시간을 토론이나 실습에 낭비하지 않겠다는 용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tofasakademi.com/the-learning-pyramid/
내용 출처: 미국의 행동과학연구기관 NTL(National Training Laboratories)
위의 그림은 학습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모형입니다. 이 모형은 학습 후 24시간이 지났을 때 배운 것을 기억하는 평균 수치(학습내용 평균 잔존율: Average Learning Retention Rates)를 보여줍니다.
가장 낮은 효과를 나타내는 교육방식은 강의 듣기(Lecture)입니다. 학습한 것의 5%만 남아있지요. 물론 강사의 숙련도나 학습자의 학습태도에 따라 다른 결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강사가 중심이 되고 학습자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수방법은 학습자 참여 중심의 교수방법에 비해 교육효과가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르친다고 학습자들이 배우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빠지기 쉬운 두 번째 함정은 과도한 활동식(activity-focused) 강의입니다. 개인적으로 솜사탕 강의라고 부르는 방식입니다. 이런 강의는 수업시간이 재미난 활동들로 꽉꽉 채워집니다. 다양한 도구들도 동원되지요. 학습자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참여하고요. 그런데 마치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학습이 아니라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맛만 있지 영양은 없는 솜사탕 같은 강의입니다.
솜사탕 강의는 어떤 면에서 강사와 HRD담당자 양방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학습자가 겪고 있는 실제 문제와 도전, 쟁점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모험을 하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손쉽게 높은 만족스러운 강의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족도 중심의 강의평가는 매우 자주 강사의 수준과 교육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취급되지요. 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처럼 강의평가설계의 오류로 인해 과정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강의 현장에선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이 잠시 쉬거나 놀다 오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본인이 사장이라면 과연 이런 교육에 돈을 쓸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학습자라면 과연 이런 교육에 자비를 들여서 올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강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사, HRD담당자, 강사, 학습자 모두에게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강사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는 것을 잘 설명하는 강사를 넘어 학습자의 탐구를 지지하고 안내하는 학습촉진자, 즉 러닝퍼실리테이터가 되어보자는 것이죠. 가장 효과적으로 학습을 촉진하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그러려면 자연스레 학습자 참여 중심의 기법 (학습 피라미드의 하단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입니다. 토의와 토론, 실습과 피드백, 서로 가르치기라는 동료 상호작용을 통해 배운 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 봅시다. 우선 기억이 나야 실천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몇 년 전 일이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K사에서 잡크래프팅(Job Crafting) 강의 의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meaning), 업무(task), 관계(relation)를 성찰하고 재구성하여(Craft) 조금 더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도록 돕는 시간이었습니다. 4시간이란 다소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대한 학습자들이 겪고 있는 직업현장의 문제들을 끌어내서 토론하고 답을 찾아가게 구성하였습니다. 강의는 잘 진행되었고 교육담당자로부터 학습자들의 피드백도 상당히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의 장 뒤편에서 잠시 강의를 참관했던 교육담당 부서장의 클레임이었습니다. 강의시간에 강사가 너무 적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왜 많이 가르치지 않냐는 클레임이었죠. 결국 우여곡절을 거쳐 한 시간에 해당하는 강사비를 받지 않는 것으로 이 일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씁쓸한 해프닝입니다. 강사비 조금 못 받은 것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강연(Lecture)과 동일 시 하는 인식 때문이지요. 강의시간에는 강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배운다고 믿는 검증되지 않은 관점이 아직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오면서 기성세대에게 온몸으로 익숙해진 교육방식이 선생님은 말하고 학생들을 듣고 쓰는 방식이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혹은 효과적인 교육에 대한 연구를 접해본 적이 없고, 수업 도구로서 활용되는 대화와 토론이 지닌 가치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교수학습 방법의 전문가인 페리스 주립대 교수, 테리 도일(Terry Doyle)은 토론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토론은 참여자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정보를 보다 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자기 인식과 스스로를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또한 서로의 관점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교환될 때 여지없이 나타나는 다양한 의견들을 토론 참가자들이 존중하게 만들어주며, 사람들이 뭔가를 알고 난 다음에 행동하도록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정보를 이해하고, 자기를 인식하고 비평하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게 하고, 무엇보다 배운 것을 행동하게 하는 힘이 토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러닝퍼실리테이션이 강조하는 동료상호작용의 힘입니다. 동료상호작용이란 함께 학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사실 일어나야만 하는) 토론하고 토의하고 서로에게 가르치며 배우는 활동입니다. 세밀하게 설계되고 세심하게 조율되는 동료상호작용은 학습의 보조도구가 아니라 학습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