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지 않는 시인
-정태춘, 박은옥의 <시인의 마을>을 듣는 밤
커버 이미지 : 정태춘, 박은옥 <시인의 마을> 앨범
시인을 만났다
한 편의 시로 젊은 날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시인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녀를 우연히 만난 날
내가 그녀의 시를 기억한다고 말하니 수줍게 웃던 그녀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유명하지 않았다)
한 때 참된 시인을 꿈꾸며 밤을 지세던
열정의 날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걸까
현실 속으로 돌아간 그녀는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
비싼 아파트를 사지 못하고
외제차를 사지 못해서가 아니다
현실의 벽 앞에서 시의 세상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름 없는 그들이 쓴 시를 읽고
풋풋한 사랑을 하고
그들이 던져버린 꿈의 조각들을 줍고
지친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들이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언어가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엔 불씨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날 그녀가 총총히 떠난 화단 언저리에 보라빛 수국이 말없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