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 - 쉬사사
낯이 익다. 낯선 중국 소설에서 익숙한 추억의 향기가 난다. 억지를 부리는 여주인공과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필요한 순간이면 반전 매력을 뽐내는 남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 감초마냥 튀어나오는 도덕적 훈계까지. 2000년대 한국 소설계를 주름잡았던 대작가, 중국으로 뻗어나가 소설계의 한류를 견인했던 불세출의 베스트셀러 보유자, 사춘기의 청춘들이 밤을 지새우게 했던 귀여니의 소설과 쉬사사의 <안녕, 우울>은 놀라우리만큼 흡사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고생하는 여주인공 25세 백수 중시시는 혼자만 알고 있는 운명적인 만남을 거쳐 남자 친구 렁샤오싱과 사랑을 키워나간다. 유학에도 취직에도 실패한 그녀는 남자 친구의 집에서 소일거리만 하며 시간을 죽인다. 자신의 욕심에 차는 대단한 일을 시작하기에는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운동부족과 불규칙한 생활이 겹쳐 살이 찌고 자존감이 떨어지던 차에 남자 친구가 던진 한마디, 우울증에 꽂혀 스스로를 우울형 외톨이 상태라고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찾는 일에 집착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나온 부록이 무색하게, <안녕, 우울>에서 우울증은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우울증은 무미건조한 전개에서 갈등을 만들어주는 계기에 불과하다. 중의학이나 종교와 연관해서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을 피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우울이란 감정에 직면하거나 깊게 탐구하는 사고의 심화가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답답해하는 신세한탄에 그친다. 다툼에서 남자 친구도 상처를 받을 거라 말해놓고도, 그것보단 더 큰 감정적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신이라고 뜬금없이 단정하는 식이다. 중시시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하는 주변과 세상이 야속하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탄한다.
중시시는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데, 실제로 문제가 그만큼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를 만들면 자신이 갈망하는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시시는 남자 친구의 단점들을 수백 개는 나열 하는데, 기실 그것들은 전부 그녀의 단점들이다. 그녀는 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인 깊은 자기인식을 결여한 사람이다. 그녀를 보고 반면교사라도 삼을만한 점은 갈등인데, 그것도 갈등이 조건 없이 내 옆에 있는 게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만 그렇다. 중시시는 남자 친구가 모든 생활을 희생하며 자신을 돕지 않자 그가 출근한 사이 말없이 떠나버린다.
백번 양보해 그녀의 우울감이 진짜임을 인정하더라도 중시시의 행동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울증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가벼운 아픔이 아니다.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중시시는 자신의 우울감을 확신하는 것에 비례해서 전문가들의 진단을 불신한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우울감을 가장 대수롭지 않은 일인마냥 홀대하는 것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중시시인 것이다. 자신의 아픔은 자신만이 알 수 있다나.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나 아니면 나를 제외한 전부 중 하나일 때는, 전자가 이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원래 모든 믿음은 자의적인 것이다. 높은 빈도로 믿음은 우리가 내린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생겨난다. 원래부터 자아가 비대한 편이었던 중시시는 자신에게 외교관 집안 출신에 걸맞은 거창한 미래가 펼쳐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허송세월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기력한 것조차 합리적으로 결정한 선택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기 위해 아픔을 호소한다. 그 아픔은 그녀에게 진짜 아픔이다.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더 현실감을 지닌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중시시가 항상 피곤한 까닭은 다른 게 아니다.
이 소설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이렇게 산재한 지뢰들을 낭만적인 사랑으로 일거에 해결하려 든다는 점이다. 중시시는 소설 내내 남자 친구 렁샤오싱의 무신경함을 섭섭해 하지만, 사실 그는 같은 문학적 표현을 읽고도 중시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다. 인생에 대해서도 고민 끝에 얻은 철학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중시시의 그 모든 기행에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네가 없으니 세상이 우울해졌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말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시시의 결점이 도드라질수록 렁샤오싱의 사랑은 더 위대해진다. 그러나 <안녕, 우울>은 렁샤오싱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여주인공 중시시가 우울한 나날들을 이겨낸 수기인 것이다. 그녀 앞에 사랑은 도구로 전락한다.
중시시의 우울감이 아침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묘사는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이 우울증이 아니라 낭만주의라는 열병이었음을 시사한다. 귀여니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2000년대의 우리나라처럼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중국도 정서적 공허감을 채워주는 듯한 낭만주의에 흠뻑 빠져있다. 이럴 때 문화계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미친 사랑의 노래는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좋다. 파도처럼 너울 치는 감정이야말로 진정성의 증거인 것처럼 말해진다. 그러나 중시시처럼 세상만사를 다 끌어들여 자신을 희생자로 몰아가는 사고방식은 엄청나게 이기적인 태도일 뿐 사랑이 아니다.
연인은 서로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했을 경우에만 도와야 한다. 컨설턴트 마크 맨슨은 자신의 저서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 “의무감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로 무언가를 연인에게 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로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 사람은 중시시처럼 자신의 가치관과 문제까지도 상대방이 해결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를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조종하려 들기 시작하며, 결과적으로 서로의 성장과 문제 해결을 방해한다. 결국 자기 내면의 고통을 회피하고 미루는 행위로 결속된 거짓된 관계가 되고 만다. 소설에서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중시시는 떠나지 말라며 렁샤오싱의 출근을 방해하면서도 자신의 곁에 있을 때면 짜증을 부리는 모순을 반복한다. 그리고 관계를 망친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중시시는 렁샤오싱이 자신과 비슷한 우울감을 호소하고 상처 입고 나서야 행복해한다. 비록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하는 존재일지라도, 그런 애정과 안도감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가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중시시가 결말에서 아름답게 포장한 방황들은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단계들이 아니라 어른이 되기 위해 진작 거쳐야 했던 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성숙한 성인의 자세 말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로 씁쓸한 소회를 마친다.
서평 <이상민 / 리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