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저도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죽어요!”
“이긍. 애 엄마도 무슨,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수?”
“네. 저도 지금까지 눈물 나도록 착하게 살았거든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을 옮겨 다니며 자랐지만, 부모 없는 아이라서 저렇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더 악착같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또박또박 돈을 모았고, 착한 신랑을 만나서 아이도 둘 낳았어요. 5살인 딸이랑 3살인 아들을 기르면서 이제 좀 행복해지려나 싶었는데… 이런 불행이 왜 하필이면 나한테… 너무 끔찍해요!”
“언니는 암인 줄 처음에 어떻게 아셨어요?”
사랑이 물었다.
“어린 애를 둘이나 키우다 보면 정말 미친년처럼 정신이 없고 힘들거든요. 그래도 주말이면 애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이랑 등산도 다닐 만큼 건강했어요.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느낀 적도 없어요. 그런데 올 초에 목에 작은 멍울이 생겼어요. 점점 커지길래 갑상선이 안 좋은가? 하고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조직 검사를 해 보자더라고요. 다행히 단순한 염증이라고 해서 떼어 버렸는데 몇 달도 안 돼서 목의 다른 쪽에서 또 그런 멍울이 만져지는 거예요! 뭔가 불안해서 이번에는 좀 더 큰 지역 병원에 갔는데 조직 검사를 하더니 대한대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왔다가 알게 됐어요.”
“그럼 언니는 림프종이세요?”
“네. T세포림프종이래요. 양다리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골수 이식을 해야 하는데, 아직 일치하는 사람을 못 찾았다고요. 제 상태론 평균적으로 1년 정도밖에 못 산다고요. 말이 돼요, 이게? 아직 애들이 5살이고 3살인데!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일곱이에요. 평생 열심히만 살다가 이제 겨우 삶을 즐길 여유가 생겼는데, 행복이 이런 건가 싶었는데… 신이 있다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달려가서 멱살이라도 쥐고 따지고 싶어요, 정말!”
“이긍, 속상해서 어쩌누….”
“그럼 언니는 이번이 몇 번째 항암이세요?”
“이번이 3번째 항암이에요. 지금까지 관해가 안 돼서… 이번에는 꼭 암세포 비율이 5퍼센트 밑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주치의가 우리의 목표라던 관해!
양이 물었다.
“관해가 안 된 거면 지금 암세포 비율이 몇 퍼센트세요?”
“1차 항암을 하고 골수 검사를 하니 15퍼센트 정도가 남아서 퇴원을 못 하고 바로 2차 항암을 이어서 했어요. 관해가 됐으면 집에 가서 남편이랑 아이들도 보고 다음 항암을 위해서 한 달 정도 몸을 만들 시간을 가졌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요. 1차가 끝나고 일주일 만에 더 세게 2차 항암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8퍼센트 정도가 남았대요. 관해가 돼야 보험이 적용된 골수 이식을 받을 수 있는데… 관해가 안 되면 골수 이식을 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이식하기 일주일 전부터 이식하고 2주 뒤까지 3주나 의료 보험에서 지원을 안 해 줘요. 그럼 이식비만 4천만 원 가까이 들거든요. 그것도 형제자매 중에 맞는 골수가 있을 때의 경우고, 저는 혼자라서 골수 은행에서 찾아야 하는데 아직은 저와 일치하는 사람이 없어요. 맞는 사람을 찾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 게, 기증 의사를 가지고 골수 은행에 혈액 샘플을 냈다가도 막상 실제로 전화가 가면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그렇게 많대요. 주겠다는 기증자들도 대부분이 직장에 다니거나 대만, 중국, 홍콩 등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휴가를 내서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오고 가며 건강 검진을 받은 뒤에 골수를 뽑는 이틀에서 삼일 동안 병원에 머물러야 하니 일정을 맞추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우리는 모두 1분 1초가 급한 사람들인데… 맞는 골수를 찾고도 공여자가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정을 기다리다 죽는 사람도 봤어요.”
“아….”
“근데 골수 이식을 받는 것도 난 겁나요. 여기 병원에서 이식 부작용으로 다시 입원한 사람들을 여럿 봤거든요. 1차 항암 때 4인실에서 내 앞에 있던 사람은 아랫니하고 윗니가 모조리 빠졌었고, 손톱이랑 발톱이 몽땅 빠진 사람도 봤어요. 으.”
“그래도… 1차에서 2차 사이에 7퍼센트나 떨어졌으니까 이번에는 꼭 관해가 되실 거예요. 같이 힘내요, 우리.”
진심을 담아 양이 말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은 모두가 같았다. 사랑도 따듯한 응원을 건넸다.
“그래요, 언니. 아가들이랑 다시 건강하게 사셔야죠! 힘내세요!”
“고마워요, 다들… 남편은 회사랑 아이들 때문에 경기도의 집에 있고, 친정 부모님은 안 계시니 혼자 투병하면서 외로웠는데… 여기서 가족들이 간병해 주는 분들을 보면 부럽더라고요. 서럽기도 하고. 특히 3호 아가씨는 어머님이 돌봐 주시니 얼마나 좋아요. 옆에서 보면서 친정 엄마가 많이 그리웠어요.”
금희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사랑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간병인이라도 두지 그러세요, 언니? 항암 치료 중에는 혼자서 화장실을 가기도 어렵잖아요. 병실에서 쓰러지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남편이 그러자고 했는데, 내가 말렸어요.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들을 돌봐 줄 이모님을 부르라고 했어요. 아직 어려서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데…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한테 그렇게 돈을 쓰면 아깝잖아요. 우리 아이들한테 빚만 남기고 죽은 엄마가 되기는 싫어요.”
“이긍… 어떻게든 살 생각을 해야는디.”
“2차 항암이 끝나고 골수 검사 결과가 나오니까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80일 동안 고생이 많았으니 휴가를 주시겠다고요. 관해가 안 됐는데도 퇴원을 시켜 준다길래 전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좋아졌나 보다 하고 뛸 듯이 기뻤어요. 근데 그게 아니라… 10일 동안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에게도 인사하고 오래요.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오라고요… 그래도 제겐 너무나 소중한 10일이 주어진 거니까… 울면서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니까, 남편과 아이들에게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가족들이랑 캠핑도 가고 사진도 찍고 정말 즐겁게 보냈어요.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옆에 없어도 마음으론 언제나 함께할 테니 아빠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지내야 한다고 손가락 걸고 도장 찍어서 약속했고, 남편한테는 내가 죽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재혼하라고 부탁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엄마가 필요하잖아요.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나를… 엄마를 아예 잊어버릴까 봐… 우리가 함께한 기억이 흐려져서 나처럼 엄마를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까 봐…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모두가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도 위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래서 말인데, 만약에 이번에도 관해가 안 되면 정말 억울해서 가만히 안 있으려고요! 이대로는 못 죽어요! 엿 같은 이 세상에, 신한테 한 방 먹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병원을 탈출해서라도 뉴스에 나올 만큼 깽판을 치고 죽을 거예요. 다들 TV에서 절 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호호.”
“그래요, 언니! 그 마음가짐으로! 다시 건강해지는 걸로 우리, 세상과 신에게 복수해요! 파이팅!”
사랑의 다부진 말에 복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따라했다.
“파이팅!”
“파이팅!”
누군가 우렁차게 외쳤다. 1호 조용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