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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Aug 18. 2021

웰컴 투 항암월드 20화

실화 소설

  복수가 묻자마자 4호 커튼이 쫙 열리더니 보호자 이기대가 나왔다.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세요! 우리 연두는 백혈병이 아니에요! 골수이형성증후군이라고, 골수 기능에 잠깐 이상이 생긴 것뿐이에요! 항암도, 안심해 교수가 딱 한 번만 받으면 된다고 설득해서 들어왔습니다. 지금 약혼한 상태라 이번에 나가면 곧바로 결혼식도 올려요. 여기에 오래 있을 아이가 아닙니다.”


  “아빠….”


  다른 환자들과 선을 긋는 기대를 말리는 4호 이연두의 가냘픈 목소리가 커튼 너머로 들렸다.


  “천만다행이네요. 그런데 제가 처음 들어 봐서요… 골수이형성증후군? 처음에 어떻게 병원에 오셨어요?”


  금희가 물었다.


  “특별한 증상은 없었지, 연두야? 내 생각에는 연두가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20대 초반부터 화장품 회사에서 오래 일했어요. 최근에 능력을 인정받아서 대리로 승진도 했습니다. 일하는 곳이 인천의 지점에서 서울의 본사로 바뀌다 보니 멀리 출퇴근하게 됐고 소속된 팀도 바뀌어서 업무에 새로 적응하느라 애먹었죠. 동시에 결혼 준비까지 하면서 다이어트도 심하게 했고. 너, 다이어트를 너무 지나치게 한다고 아빠가 말렸었지?”


  “웨딩드레스가 안 맞는 걸 어떡해. 결혼식 날에 예뻐 보이고 싶었단 말이야, 힝. 남이 보고 싶다!”






  불행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안 받고 결혼 전에 살을 안 빼는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다가 그런 날을 더 이상은 맞을 수 없는 어느 날의 시작. 어쩌면 다시는 어제와 같은 일상이 없으리라는 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커다란 불행조차 그랬다.


  “안 그래도 배 서방이 모레 오기로 했으니까 이틀만 참아.”


  “정말?”


  “그래.”


  “와, 신난다!”


  “으이그. 그렇게 좋아?”


  “사랑하니까! 그래도 아빠만큼은 아니구우.”


  “신남이는 사위 될 녀석이에요. 자기가 연두를 돌보겠다고 그렇게 우겼는데, 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도 이렇게 아픈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고… 뭣보다 아직은 결혼 전이고 내 딸이니 나랑 아내가 책임져야죠. 아무튼 우리 연두는 백혈병이 아니고 일시적인 증후군이라서 곧 여기서 나갑니다.”


  “부럽네요, 정말.”


  금희가 말했다.


  “전 단계, 배혀벼 저 다계래쪄요.”


  조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원희의 말투가 어린아이로 변하며 갑작스레 어눌해졌다. 


  “뭐라고요?”


  기대가 인상을 찡그리며 짜증 섞인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우리 엄마, 말투가 이럴 때도 문자를 치거나 글을 쓰면 아무렇지 않거든요? 울 엄마의 머릿속은 완전히 정상이니 그렇게 야단치듯 소리치지 마세요!”


  “아니… 난 그냥… 잘, 못 알아듣겠어서. 미안합니다.”


  “엄마, 이제 그만 쉬자.”


  휙. 사랑이 커튼을 닫았다. 커튼 사이로 중얼거리는 원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배혀벼이 되 수도 이느디… 조시, 조시해야 하느디요.”


  “알아, 엄마. 백혈병으로 진행될 수도 있는 거. 그래도 저 친구는 괜찮을지도 모르고, 미리 알려 준다고 고마워 할 일도 아니니까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으, 으. 아라쪄요.”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복수는 다시 드러누웠고, 용녀는 녹색 소변대와 투명한 소변통을 챙겨 화장실로 갔다. 기대의 겸연쩍은 뒷모습을 보며 양도 하얀 커튼을 닫았다.


  모두가 어제까지 평범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건강을 자신하던.


  10만 명 중에 한두 명이라는 확률에 포함되기에는 착한 사람들. 연쇄 살인범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질 나쁜 사기꾼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기에 왔는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인생의 제비뽑기에 운 나쁘게 걸린 건가.


  신의 짓궂은 장난인가.


  이날 양은 6인실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산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대학 은사인 정우성 교수가 한 말이 양에게 떠올랐다.


  “회사는 어때? 일은 잘하고 있어?”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하. 이거, 이거 크게 잘못하고 있구만? 회사일은 최선을 다하는 거 아니야. 적당히 하는 거지.”


  “네? 적당히요?”


  “그래. 적당히. 하하.”


  “적당히. 그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교수님.”


  “그렇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무리하지 마. 대부분의 일은 조금 더 잘되거나 조금 못되거나, 그 정도의 차이야. 무리하면 언젠가 탈이 나.”


  그때의 양은, 사회로 첫발을 뗀 제자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스승의 배려 섞인 말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그 말이 맞았다.


  적당히. 무리하지 말아야 했다.


  살아서 여기를 나간다면 양은 이제 더 이상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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