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2호에서 나오던 원석이 양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양 씨는 어때요? 어젯밤에 시끄러워서 잘 못 잤죠?”
“아, 선생님도 들으셨어요?”
“네.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때요, 하양 씨는? 이제 슬슬 후폭풍의 기운이 느껴지나요?”
“아직은…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네, 선생님만 믿어요. 그런데요, 선생님. 저….”
“말씀하세요.”
양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원석이 한걸음 다가섰다.
“저… 5호 할머니가 48시간 선고를 받으신 건가요?”
“안타깝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원래 환자를 바로 앞에 두고 하나요? 처음 봐서, 잘 몰라서요.”
“아니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채송화 씨뿐 아니라 하양 씨를 비롯해서 앞에 계신 다른 환자 분들도 뵙기가 죄송하더군요.”
“아… 정말로 48시간이 지나면… 나빠지시는 거예요?”
“중환자실에서 온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이니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볼 겁니다.”
48시간.
아직 스스로 숨 쉬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잠시 뒤면 세상에 없다? 양은 실감할 수 없었다.
의사들은 도대체 사람이 죽을 시간을, 한 사람의 영혼이 몸을 떠날 시간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계산해 내는 걸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단정해서 말하는 걸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양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환자들이 아침을 다 먹기도 전인 이른 시간. 굳은 표정의 심해가 원석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심해는 반가워하는 기대의 마중을 받으며 곧바로 연두의 자리로 가 말을 건네며 한참을 머물렀다.
“이, 연두 씨. 몸은 좀 어떤가요?”
“밤에 열이 나서 많이 놀랐지요? 면역력이 제로로 떨어지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열입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혈액 배양 검사와 X-ray 촬영에 이어 항생제 처방까지 내렸으니, 힘을 내세요.”
“저도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연두 씨의 또랩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쓴 백혈병에 대한 책인데, 한번 읽어 보세요.”
심해답지 않게 말이 많았고, 말들이 겉놀았다. 연두는 거의 말이 없었다. 5분 정도 지나 4호를 나와 양에게 오는 심해의 얼굴은 다정스럽게 들리던 말투와는 달리 꽤 지쳐 보였다.
심해는 혈액 수치가 0을 향해 잘 떨어지고 있다며 양호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1호 용녀에게로 갔다. 양의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려는 듯 보였다.
뭐지? 왜 4호에게만 친절하지? 이상하게 가라앉던 양의 기분은 아침을 먹은 뒤 배선실에 다녀온 금희의 설명을 듣고서야 풀렸다.
“양아, 오늘 안심해 교수님이 4호한테 만성골수백혈병에 대한 책을 주셨는데, 너한테는 안 줘서 서운했지? 회진도 빨리 끝내고 가 버리고.”
“응.”
“오늘 배선실에 4호 아버지가 와서 자랑을 하더라. 안심해 교수님이, 자기 딸한테만 책도 주고 응원도 많이 해 줬다고. 낯부끄럽지도 않나 봐?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걸 보면.”
“응? 왜?”
“새벽에 난리가 났었다며? 나는 자느라 몰랐는데, 배선실 사람들이 말해 주더라. 4호가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열이 나고 아프니까 이기대 씨가 몸이 달아서 안심해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나 봐. 원래 의사들의 연락처는 안 가르쳐 주는데, 교수님께 자기 딸의 상태에 대해 지금 당장 꼭 물어볼 게 있다고 사정사정했더니 알려 주더래. 그런데 전화를 걸자마자 난리를 쳤나 봐.”
“아… 그게 안심해 교수님이랑 통화하는 소리였어? 세상에!”
“이기대 씨의 말로는 자기는 불안해 죽을 지경인데, 잠이 덜 깬 안심해 교수의 목소리를 들으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던데…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그건 아닌데 싶더라. 하여튼 이기대 씨의 결론은, 오늘 안심해 교수의 달라진 태도를 보니 자기가 그렇게 한 보람이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다들 자기처럼 해야 한다며 충고를 하더라. 그러겠다고 해야 할지, 난 잘 모르겠더라.”
금희의 말을 들으며, 양은 심해 앞에서 조용하던 연두의 마음을 생각했다. 따듯하게 다독여 주고 싶었다. 아프기 전이었다면 분명히 먼저 다가갔을 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위로가 그저 안쓰러워 보일 수 있음을 양은 잘 알았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마당에 누가 누굴 응원한단 말인가.
연두에게 나는
제 코가 석자인, 누구보다 심각한 상황에 빠진 말기 암 환자일 뿐이야.
양은 조금이나마 느껴지기를 바라며 마음으로만 연두의 어깨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