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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Sep 07. 2021

웰컴 투 항암월드 32화

실화 소설

  “뭔데요? 말씀하세요.”


  “남자 친구가 있으신가요?”


  “네?”


  양으로선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기대감으로 반짝일 금희의 눈빛이 느껴졌다.


  금희는 언젠가부터 원석이 오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문득 급한 볼일이 생각났다며 자리를 비우던지 자는 척을 하던지 먼 산을 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체했다.


  물론 그럼에도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은 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석과 양은 금희가 옆에 있어도 의식하지 않고 둘만 대화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래도 설마… 민머리에, 가슴에는 관을 꽂고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나야. 


머리를 못 감고 샤워도 못한 지 벌써 3주가 넘었다고!


  병동안내문에선 매주 2회 이상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샤워를 하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가슴에 꽂힌 히크만에 감염이라도 생길까 무서워서 양은 안 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매일 금희가 뜨거운 수건으로 양의 머리와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 양이 생각하기에, 원석이 자신을 여자로 볼 리는 없었다. 양은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쳤다.


  “왜요? 면회 오는 남자도 하나 없고, 불쌍해 보이세요? 하하.”


  “말을 돌리시는군요? 찾아오는 남자는 코빼기도 안 보여도 아끼는 남자가 없기에는 머리통이 어마어마하게 페이털합니다만.”


  “하… 하하. 제 민머리를 그렇게 봐 주신다니 영광이네요.”


  “결국 대답을 안 하시는군요.”


  “선생님, 은근히 끈질기시네요?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아직 마음에서 정리 못한 남자는 있고요. 아, 남자들…인가? 하하. 대답이 됐나요?”


  “그렇군요. 이미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지우기는… 어렵죠.”


  “이제 선생님이 대답해 주세요. 그게 왜 궁금하신 거세요?”


  “하아. 제가 물어본 이유는.”


  “네.”


  “사실 그 이유는….”


  “네.”


  “그러니까, 그게, 항암 치료를 하면 불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하아… 이런 말은 안 드려도 되는데 말이 나온 김에 드리자면, 백혈병 치료에 쓰는 항암제는 일반 다른 고형암 수술 후 외래로 다니며 맞는 항암 주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셉니다. 일반 항암 주사는 보통 병원을 방문해서 몇 시간 동안 맞으면 집에 돌아가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도 머리가 빠지고 온몸이 아프고 토하고 치료 횟수가 늘어날수록 약이 들어간 혈관들이 죽어 버려서 팔에서 더 이상 피를 뽑을 수가 없을 지경이죠. 다리나 발에서 혈관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보통 5일에서 7일 정도 밤낮으로 투여해서 면역력을 제로로 만들 정도인 백혈병 환자의 항암제는, 아무리 졸라덱스를 맞고 피임약을 먹어도 불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불임이 될 가능성이 큰 것과 남자 친구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아, 이런! 그게,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젊은 여성의 경우 남편이, 특히 미혼이라면 남자 친구가 의사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불임의 가능성이거든요. 치료가 끝나면 임신이 가능하냐. 임신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아이의 출산이 정말로 가능한 거냐.”


  “네? 내 여자를 낫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없냐, 내 아내를 살릴 더 좋은 치료 방법은 없냐가 아니라, 그저 임신이 가능하냐? 출산이 가능하냐… 라고요?”


  “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혹시나 하양 씨도 그런 일이 생기면 상처 받진 않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아, 이런.”


  “아하. 남자 친구는 없으니 제게 그런 상처가 날 일은 없겠네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아. 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원석은 할 말을 못다 한 사람처럼 돌아섰다. 양은 원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양의 슬픈 미소에 금희는 다시금 원석이 미워졌다.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왜 불임까지 들먹이면서 상처를 줘, 왜! 나쁜 놈의 의사 같으니라고!  


  “스스로도 굳이 안 해도 될 말이라면서 왜 한대? 양아, 신경 쓰지 마. 의사들은 항상 최악을 얘기한대. 자기들이 책임을 안 지려고 말이야. 그까짓 불임이 되든 안 되든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상관이 있어? 일부러 아이를 안 낳고 여행 다니면서 재미나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 나이가 들어서 혹시 쓸쓸하면 입양을 하거나 고양이를 길러도 돼.”


  “응. 맞아. 그러는 엄마야말로 괜찮아?”


  “그럼! 엄만 걱정 안 해. 우리 양인 완전히 나을 거야. 나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불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꼭 불임이 될 거란 말도 아닌데 뭐. 그러니 너도 마음 편하게 생각해.”


  “헤헤. 엄마가 괜찮으면 됐어.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은 불임을 생각하면서 우울해하기엔 다른 문제가 너무 크잖아. 일단은 살아야지. 나머진 그 다음이고.”


  “…그래.”


  양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담담했다.


  물론 원석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못 낳고는 어쩐지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잖아.


  원석이 말했듯,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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