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이날 양의 과립구는 14.
“선생님, 우리 애가 어제 0을 친 지 하루 만에 0을 벗어났네요? 괜찮나요?”
“어머님, 14면 아직 0이나 같습니다.”
원석의 말이 금희를 다독였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하양 씨는 0을 치는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젊은 환자들은 아무래도 체력이 좋아서 몸이 빨리 회복되기 때문에 보통 삼사 일 정도 0을 치죠. 짧다고 나쁜 게 아닙니다. 0을 쳤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일주일이 넘게 0에서 못 올라오는 환자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여러 가지 감염이나 합병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과립구가 0을 치면 저희가 촉진제를 씁니다. 몸이 빨리 회복되게 도와주는 겁니다. 다만 하양 씨처럼 나쁜 세포의 비율이 높은 경우에는, 촉진제로 인해서 남아 있는 나쁜 암세포까지 급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안 쓰기로 했습니다. 이해가 가시죠?”
“네.”
“오늘은 혈소판이 딱 2만이네요. 어제 8천까지 내려가서 노란 피를 2봉이나 맞아서 그나마 이 정돕니다. 어차피 내려갈 테니 오늘은 1봉만 맞읍시다.”
“네.”
양이 노란 피를 맞는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혼자의 동생 숙자였다. 숙자의 손에는 온갖 과자가 한가득 담긴 큰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3일 만에 온 숙자는 앉자마자 시끄럽게 과자 봉지를 뜯더니 심 여사와 함께 혼자의 옆에서 아작아작 과자를 먹었다.
금희가 자리를 잠시 비워서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하이고… 동생이 있을 때는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나만 믿으슈. 언니, 내 이년을 가만두지 않겠수!”
“안마해 드리면 얼마나 시원하다고 하시는데 글쎄, 그것도 못하게 하더라니깐요?”
“걱정 마우. 안 그래도 내가 오는 길에 둘만이한테 따끔하게 가르쳤슈. 남의 말만 듣고 간병인이나 언니한테 그러는 거 아니라고! 죄송하다니, 이젠 안 그러겠지. 내가 요년을 박살 내 버릴 테니 좀만 기다리슈!”
분명히 금희를 노린 말들이었다.
엄마한테 병실로 오지 말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그게 오히려 엄마를 더 자극할 수도 있어… 양은 가시방석에 앉아 메시지를 쓰다 지웠다 했다.
이때 금희가 예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병실로 들어왔다.
“정말 잘 됐어요! 잘 결정했어요!”
“그동안 저희 어머니를 따듯하게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구,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나. 떠나기 전에 우리 또 차 한 잔, 해요.”
금희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로 돌아왔다.
“예진 씨가 어머니를 요양 병원으로 모셔 가기로 했대. 처음에 주치의한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워낙 위중한 상태라고 해서 장례를 치르고 정리하는 시간까지 5일 정도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지금 사흘이 지나도 어머니가 괜찮으시니 어머니와 좀 더 함께하려고 휴가를 더 늘렸다더라. 자기가 다시 돌아가고 나면 아무도 없는 대한대병원에 혼자 남으시니까, 고향집 근처의 요양 병원에 계시는 게 어머니께도 나을 것 같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종갓집 재산을 다 넘기는 조건으로 근처에 사는 조카랑 조카며느리가, 지난번에 왔던 아기 엄마 말이야, 자주 들여다보기로 했나 봐. 가시기 전에 딸 얼굴도 눈에 담고 또 예진 씨가 직접 모시고 내려간다니 채송화 할머니에게도 참 잘 되었지? 예진 씨가 곧 아가랑 남편까지 데리고 다시 어머니를 보러 올 거래. 살아 계신다면 만나 보실 텐데… 치료가 되는 상황이 아니니 아무래도 이번에 보는 게 마지막이지 않겠나 하더라.”
“응… 그래도 다행이다. 채송화 할머니는 그럼 언제 가시는 거야?”
“이틀 뒤래. 아휴, 좋은 일인데 왜 이리 눈물이 나지?”
“이제 채송화 할머니를 못 본다니 서운해서 그렇지. 나도 맘이 이런데, 엄만 오죽하겠어.”
이런 말들을 주고받느라 양은 잠시 혼자와 숙자를 잊었다.
이때 숙자는 숨죽이며 공격할 틈만 찾고 있었다.
“저년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나같이 살살거리면서 우리 언니한테만 못살게 굴고 지랄이라니까? 내 오늘 저년의 몹쓸 버릇을 싹 뜯어고쳐 놔야지!”
“그러니까.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나? 하이고. 저년은 우리가 지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른다니까, 동생?”
“귓구녕이 막혔으면 뚫어야 안 되겠수? 이년아! 이 몹쓸 년아! 네가 둘만이한테 거짓말로 고자질을 하고! 모자 사이를 이간질을 시켜 놓고도 발 뻗고 자냐, 이 썩어 빠진 년아! 아직도 지 얘기 하는 줄도 모르는 멍청한 년아!”
커튼 너머로 어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지, 연두의 머리에 난 종기를 살피던 인턴 간호사가 깜짝 놀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금희는 자기를 향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엄마, 엄마! 일부러 싸움을 거는 거야! 휘말리면 지는 거, 알잖아. 참아.”
“그래, 사람 같지 않은 인간들을 상대해서 뭐해.”
“응. 엄마, 신경 쓰지 말자.”
“사람 같지 않아? 누가? 네가? 하이고. 네 어미뻘 되는 사람한테 할 소리냐, 그게? 네 이년!”
“흥, 난 당신 같은 엄마를 둔 적 없거든?”
“엄마, 대꾸하지 마.”
“그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실컷 떠들어 봐라. 난 하나도 안 들려. 아. 아. 아.”
“하이고, 더러워? 누가 더러워? 하루 종일 설사를 해대는 게 누군데 지금 누가 누구한테 더럽다는 거야? 누가 누구한테 병을 옮긴다는 거냐고! 동생, 건강한 우리 둘만이가 뭐라도 옮기겠는가? 둘만이가 설사하는 백혈병 환자한테 뭘 옮으면 올랐지, 안 그래?”
“언니 말이 다 맞수. 저 빌어먹을 년. 에라이, 빌어먹을 년아! 아가리 닥쳐라.”
혼자가 양을 건드리자, 금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릴 사이도 없이 금희는 뛰쳐나갔다.
“뭐야?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숙자가 싸움닭처럼 달려나왔다.
“오냐, 이년아, 너 오늘 잘 걸렸다! 우리 언니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사사건건 걸고넘어져? 걸고넘어지길!”
“누가 누굴 건다는 거예욧?”
“몰라서 물어? 면회자가 많다고 간호사실에 일러바치질 않나, 멀쩡한 간병인을 이상하다고 둘만이한테 일러바쳐서 모자 사이를 갈라놓질 않나, 또, 급해서 그깟 화장실 좀 잠깐 쓰려던 둘만이한테 죽일 듯 달려들질 않나, 또… 또… 이거 말고도 내가 아는 게 셀 수도 없이 많아, 이년아!”
“나 참. 병실에서 보호자는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되는데도 매일 과자에, 컵라면에, 치즈에 온갖 걸 먹고 그대로 내버려 둬서 하루살이까지 꼬이게 하고! 보호자가 환자만 사용하는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나, 간병인은 환자도 소독하고 쓰는 세면대에다 똥오줌을 닦은 수건을 빨려고 하질 않나, 하루 종일 침대를 밀어 대서 양쪽 옆자리에 간호사 카트도 못 들어올 지경인 데다, 금방 수술한 백혈병 환자를 안마한다고 침대에 올라가서 손이며 발로 주물러 대니 당신 언니를 생각해서 말해 준 건데 고맙다곤 못할망정 뭐요? 침대가 무게를 못 이기고 내려앉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침대가 내려앉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가 지랄발광을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냐고! 이년아!”
“우리 애가 당신들 옆에 있으니까! 하루살이가 여기까지 날아오고 화장실도 세면대도 다 우리 애가 사용하는 거니까! 이 병실에 당신들만 있는 줄 알아? 그렇게 제멋대로 사용하고 싶으면 1인실로 가지, 왜 여기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줘? 그리고, 2호에 면회자가 우글거리든 어쨌든 난 간호사실에 말한 적 없어! 하도 시끄러우니 다른 환자가 신고했나 보네!”
“오냐,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당장 나와, 간호사실에 가서 물어보자고! 네년이 거짓말을 하는 거면 오늘 나한테 작살날 줄 알아라!”
“가, 가! 가자고! 누가 겁낼 줄 아나? 아니면, 내가 아니면, 당신, 나한테 사과할 거야?”
“사과는 얼어 죽을! 그게 아니더라도 요년아, 오늘이 네년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숙자와 금희는 서로 물어뜯을 듯이 병실을 나갔다.
양이 아무리 금희를 불러도 이 순간 금희의 눈과 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 병원 침대에 갇혀 버린 나… 양은 울고 싶었다.
커튼이 쳐진 4호를 뺀 예진과 송화, 복수, 용녀와 김 여사까지, 어느새 모두가 나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바깥을 내다봤다. 복도에서는 온 병동이 들썩거릴 정도로 시끄러운 말소리가 울렸다.
“이년이지? 우리 자리에 사람이 많다고 매번 일러바치는 게?”
“간호사님, 너무 억울해요! 누구에요? 누가 신고한 거예요?”
“죄송하지만 신고하신 분이 누군지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아니, 간호사님, 나 아니잖아요! 누군지 말 못해도 그건 말해 줄 수 있잖아요!”
“네, 아니에요.”
데스크에 앉은 간호사의 대답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더 키우고 말았다.
“네년이면 네년이라고 하겠어? 이 상황에? 오냐, 이년아! 이것 봐라! 이래도 네가 오리발을 내밀 거냐?”
“그럼 당신들이 내미는 건 오리발보다 더한 닭발이네?”
“죽어라, 이년아!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숙자가 잡아 뜯을 듯이 달려들자 금희도 머리로 마구 들이받았다.
면역력이 거의 0인 양이 마스크를 쓰고 복도로 나갔을 때는, 다른 병실의 사람들까지 고개를 빼고 내다보는 가운데 간호사들이 양쪽에서 두 사람을 뜯어말리고 있었다.
양은 울면서 금희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엄마, 엄마, 나를 봐서라도 제발 그만해.”
“이거 놔! 세상에 이런 적반하장이 어딨어?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아니야. 어른이 아닌데 어른 대접을 할 필요가 뭐가 있어?”
“엄마….”
금희는 울부짖는 양을 뿌리치고 다시 숙자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예진이 금희를 가로막았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따님을 생각하세요.”
그제야 금희는 양을 바라보았고, 씩씩거리면서도 차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해?
이미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고 있는데도 양은 계속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