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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Oct 13. 2021

웰컴 투 항암월드 44화

실화 소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자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모두가 입 밖엔 안 내지만 금희와 혼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는 안 되겠어. 


  양은 저녁을 먹고 복도로 나와 대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복도 운동이 금지된 상태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대양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2호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금희를 좀 말려 달라고 부탁했다.


  대양은 야근 중이었지만 바로 달려왔고 병실 앞에서 혼자에게서 불려온 둘만과 마주쳤다. 대양은 둘만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오더니 복도에서 기다리던 양에게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도 말이 안 통한다. 숙자 이모? 가 그렇게까지 한 건 미안한데,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너무 못살게 군다고 하더라고. 말로 풀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원석 주치의하고 얘기해 보면 어때?”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을 했어. 근데 아… 고자질도 아니고… 오빠, 나 사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엄마가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더 못 참는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말려도 자꾸 부딪치니까. 나 때문에 날카로워진 엄마 모습을 보기도 너무 힘이 들고. 휴, 아무래도 주치의를 만나 보는 방법 밖에 없겠지? 병실을 옮겨 달라고 하려고. 2인실로. 오빠 생각은 어때?”


  “신청하면 옮길 수는 있나?”


  “아마 그럴 거야. 다들 6인실에 오고 싶어 하거든. 2인실은 많이 비싸서.”


  “그럼 그게 좋겠다. 혹시 돈이 모자라면 내가 보탤 테니 그렇게 얘기해 봐.”


  “응, 고마워, 오빠. 나도 모아둔 돈이 있으니 걱정 마. 마음만 받을게.”     






  대양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자, 양은 금희의 의견을 물었다.


  “엄마, 저 사람들은 앞으로도 저럴 거야. 그럼 안 부딪칠 자신 있어?”


  “아니. 솔직히 너무 짜증나. 참아 보긴 할 텐데 자신이 없네.”


  “그럼 엄마, 우리 2인실로 옮길래?”


  “2인실로?”


  “응, 오빠랑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엄마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거 같아서. 나도 그렇고… 엄마가 괜찮다면 오늘 주치의하고 상의해 볼게. 병실비가 부담되면 내가 통장에 모아 놓은 돈 있어. 그 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쓰겠어? 돈은 이럴 때 써야지. 내가 주치의랑 얘기할게.”


  “그 코 묻은 돈을 지금 왜 써… 나중에 네가 그걸로 살아야지. 엄마랑 아버지한테 돈 있어. 걱정 마. 아무튼 그러자. 나 정말 너무 힘들어.”


  양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금희는 주저앉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다.


  양에게 뭐라도 옮길까 봐 바싹 붙여 쓴 마스크는 24시간 내내 숨통을 조였고, 무너져 버린 수상의 모습도 볼 때마다 금희의 기운을 뺐다.


  수상은 아침 8시면 격리 병동 바깥에 위치한 휴게실로 와서 밤 11시까지 하루 종일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구두를 신은 채 제자리에서 꼼짝 않는 발에는 무좀이 심하게 도졌고, 누구와도 말을 안 섞는 입에선 군내가 날 정도였다.


  금희가 배선실에서 믹스 커피를 타서 나눠 먹으려고 가지고 나가면 수상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양의 상태를 물었다. 병원에서 돌아간 뒤에는 밤새 줄곧 우는지, 금희가 빨랫감을 들고 집에 가면 온 집안에 눈물과 콧물 범벅의 휴지 뭉치가 굴러다녔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수상의 행동은 양에 대한 꾸지람이었다.


  “그까짓 재단이 뭐가 중요하다고, 병원을 안 가서… 병원을 빨리 갔어야지! 병원을 빨리 갔으면, 그랬으면 약만 먹어도 되잖아! 아이고,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수상의 원망은 4호 연두가 백혈병이 아니라 가벼운 증후군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뒤부터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수상의 말 속에는 부모로서 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나무람과 한스런 후회가 담겨 있었다. 같은 마음이기에 금희는 그 말들을 듣기가 더 괴로웠다.






  밤 11시가 넘어 혼자와 숙자가 수다를 시작하고 모두가 잠든 시간, 양은 금희에게 눈짓을 하고 조용히 병실을 나와 원석을 찾았다.


  원석은 간호사 데스크 옆에 마련된 의사들의 자리에서 환자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선생님, 잠깐 저랑 말씀 나누실 수 있으세요?”


  한밤에 찾아온 양을 보고도 원석은 놀라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회전의자를 뒤로 빙그르르 돌려 양을 마주했다.


  원석은 둥근 탁자에 앉아 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앉으세요. 이 밤에 무슨 일입니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본 그날부터, 원석은 어쩐지 양에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양을 보는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든지, 더 이상 팔을 흔들며 인사하지 않는다든지, 이전에는 회진할 때 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이젠 심해가 양과 대화하는 중에도 동료 여의사와 장난을 친다든지, 그런 식의 아주 사소한 변화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양은 분명히 느꼈다. 그래, 사원석은 의사로서 날 보고 있어. 이제 주치의를 또래 친구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해. 나는 주치의에게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의견을 들으러 온 거야. 양은 철저하게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원석을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2인실로 옮기면 어떨지, 주치의 선생님의 의견을 여쭤 보고 싶어서요.”


  마스크를 벗은 원석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려졌던 부분이 드러난 원석의 얼굴은 양이 받았던 그동안의 인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오후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요?”


  “…네. 들으셨어요?”


  “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양은 앉은 채로 고개를 깊숙이 숙여 사과했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가족이, 특히 자식이 아프면 부모님들은 자신도 모르게 투사가 되죠. 보호자 간의 싸움이 커져서 경찰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도 저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그래서 병실을 옮겼으면 하는데, 면역력이 0인 제 몸 상태에서 이동이 가능할까요?”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타고 빨리 이동하면 괜찮을 겁니다. 여긴 격리 병동이라 복도도 깨끗한 공기로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아! 가능은 하네요?”


  “사실, 백혈병 환자에게는 2인실이 더 좋습니다. 해외에서는 우리처럼 백혈병 환자가 6인실을 쓰는 건 상상도 못해요. 환자 여섯 명에 보호자가 한 명씩만 있어도 12명이 한 공간에 24시간 365일 우글거리는 데다, 보호자 1인 원칙은 시도 때도 없이 어겨지니까 말입니다.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세면대를 통한 감염이나 오늘 일 같은, 온갖 문제가 생기죠.”


  “아! 그렇겠네요. 그런데 2인실에 제가 갈 자리가 있을까요?”


  “2인실에서 6인실로 오려는 사람은 줄을 서 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옮길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2인실로 한번 가면 다시 4인실이나 6인실로 오기는 힘들 겁니다. 아직 치료 기간이 꽤 남았고 비용 차이가 큰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인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지혼자 할머니네 때문에 너무… 힘들거든요. 병원에서 병이 아니라 사람과 싸워야 할 줄은 몰랐어요.”


  “그게, 참 어려운 부분이죠. 병실 이동은 수간호사님께서 담당하시니 제가 아침 일찍 진행되도록 메모를 남겨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도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양이 일어서자, 원석도 일어서서 양을 바라봤다. 원석의 키가 생각보다 작아서 양은 조금 놀랐다.


  양은 그동안 이렇게 똑바로 서서 원석을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응급실에서부터 늘 침대에 앉거나 누워서 마주했고, 서 있을 때에도 큰 비장 탓에 조심하느라 늘 몸을 구부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의사 가운을 벗은 사원석과 병원이 아닌 곳에서 마주친다면 못 알아볼 수도 있겠어. 비로소 양은 처음으로 원석과 동등해진 기분이었다. 다시 내 삶의 결정권을 찾은 느낌. 양은 홀가분하게 돌아섰다. 


  이날 밤 양은 정말로 오랜만에,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편안하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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