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늪에 빠지다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발령받은 지 17년이 되는 초등교사다.
아이를 챙기느라 3년 6개월 휴직기간이 있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지 모른다는 참담한 심정일 때, 가르쳤던 반 아이들을 보며 휴직을 결정했다.
자기 생각을 얼마든지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고,
어디 아픈 곳 없이 몸과 정신이 성장하는 아이들이
너무 완벽해 보였고 부러웠다.
너무 완벽해서 내가 감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 모든 걸 내놓고,
내 아이가 반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다면,
영혼이든 수명이든 뭐든 내놓을 참이었다.
아이들을 보며 부러움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깨달았다.
학교에 나가면 안 되겠다.
학년을 마치고 휴직을 결정했다.
세 살 터울 동생을 만들어주겠다며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억 계획임신했던 둘째 출산에 임박한 이유도 있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엉켜버렸다.
나의 꿈
나의 가정
나의 인생
화려하지는 않아도 순탄하게 살아갈 거라 생각한 소박한 바람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는 부서진 바람들 속에서 혹시나 하며 조각을 맞추고 있을 나에게 보란 듯이 바닥을 체험하게 했다.
33개월의 아이는,
늦은 오후 낮잠 두 시간으로 다음 날 늦은 오후까지 하이텐션으로 지새웠다. 뛰며 돌아다니며 입을 꾹 닫은 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이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듣기 불편한)
윗집 아랫집에 들릴 수밖에 없었던 집이었고 (아랫집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도 들렸기에;) 우리는 아이를 태우고 어두운 도로를 찾아 밤새 운전을 했다. 그렇게 타면 아이가 차분하게 밖을 바라보다 쪽잠을 자기도 했으니까. 밤새 두어 시간도 못 잔 우리 부부는 수면욕이 충족 못되었을 때 인간이 얼마나 난폭해지고 예민해지는가를 꽤 오랫동안 체험했다.
눈을 한시라도 뗄 수 없게 했다.
기저귀를 못 뗀 상태였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똥을 벽에 바르고 손에 범벅을 하고 있거나,
입에 넣지 말아야 할 온갖 것들-옷깃, 흙, 클레이, 장난감, 돌, 끈, 뭐든지-을 입에 넣고 씹고 물었다. 의자를 끌고 가 싱크대 물을 틀거나, 위험한 높은 곳에 기를 쓰고 올라가거나,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어디를 가면 민폐 그 자체였다.
갑자기 하기 시작한 트리오 셋-듣기 힘든 소리, 제자리 뛰기, 퍼드덕 날갯짓하기-도 있었지만,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실례였다,
택시에서 오줌 싸기. 바닥에 드러눕기,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서 도망가기, 마음에 안 들면 근처에 있는 사람 깨물기.
하루하루 버텨내는 게 기적이었다.
만삭의 나는 아이를 돌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기 일쑤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남편을 지인을 만나러 잠깐 나간 사이.
아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아이와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남편이라도 새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예고편 밖에 보지 못한 앞으로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섭고 무거웠다.
남편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남겨질 남편이,
밤낮없이 애쓰는데도 뱃속에서 내색 없이 건강하게 커주는 둘째가,
무엇보다도 엄마에게 온갖 원망을 받고 있는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누가 뭐래도
아이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꿈꾸는 대로 실현해 보는 삶,
누군가와 깊게 연결되는 삶,
독립되어 스스로 꾸려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아이.
그 아이. 내 아이가 나와 남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여웠고 미안했다.
너를 미워해서.
너를 탓해서.
그날로 난 결심 했다.
피할 수 없는 이 삶을 포기할 힘으로
기꺼이 살아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