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너는 너!
자폐 아이에게도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ㅣ나는 나. 너는 너.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말이다.
생판 모르는 누군가에게는 잘 지켜지지만,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는 순간부터 감정이입이 되고 오지라퍼가 되기 십상이다.
관계가 오래되거나 깊을수록, 상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내 도리인 양 선을 넘는다.
직장 동료의 말엔 제법 잘 귀기울여듣다가도,
오래 알고 지낸 친구나 남편의 말에는 끝까지 못 듣고 같이 웃고 울며 내 일처럼 소매 걷어붙이고 나선다.
특히 내 아이는 더더욱 냉정해지기 어렵다.
너와 나는 한 몸인 적이 있었다고 느껴서일까?
뱃속의 네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나는 찾았고,
내가 힘든 날은 뱃속의 너도 힘들어했고,
내가 기쁘고 좋은 날은 뱃속의 너도 발을 차며 함께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에게만큼은 노력해도 냉정해지기가 어려웠다.
너의 어려움은 나의 아픔이고,
너의 실패는 나의 한계고,
너의 고통은 나의 자책으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임신했을 때에도
우린 함께였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 달랐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당연한 사실이
내 아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미숙하니까.
아이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어려우니까.
아이가 그럴 의지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아이에게 장애가 있으니까.
아이에게 한계를 긋는 건 바로 나였다.
당장 무엇을 고르고 싶은지 말로 물어보면 무엇을 먼저 묻는지에 따라 갈팡질팡 대답하는 아이.
기다려야 하고, 참아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막무가내의 아이.
누군가와 함께 할 언젠가를 꿈꾸기보다는 "지금"과 "나"만 보는 아이.
그럴듯한 여러 이유로,
나는 아이의 선택권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기회를 주는 과정이 더 고달프고 힘들어질 것 같으니.
그냥 결정해 주는 것 번거롭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덜 상처받고 덜 어려울 길을
선택했다.
마치 널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며,
아이가 커가니,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채워줄 수 없음을,
아이가 아이의 삶을 살아가게 해야 함을.
아이가 아이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불완전하고 위태롭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누구의 삶도 고통과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들 불완전한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살아갈 뿐이다.
아이가 꾸려갈 아이의 삶은,
안전하고 아늑하고 무탈하게 보호받는 온실 속 화초의 삶이 아닌,
사람들과 부딪히고 깨지고 서로 맞춰가며, 도전하고 좌절하고 또 힘을 내는 일련의 굴곡진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풀꽃 같은 삶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아이가 살아갈 삶에 응원과 위로를 보태면
그만인 것이다.
거기까지가 부모인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