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길도 없고 답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떨어진 공이 튀어 오르듯

by 삶은 사람

자폐.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만나본 적 없었다.

영화 <말아톤>을 본 적은 있었지만, 나의 아이는 조승우 배우가 맡았던 역할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서번트 증후군이었던 자폐성 장애가 자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의사소통과 사회성에 결함은 있으나, 다른 부분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나의 예상과 기대를 저버리고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성 장애.


내가 그동안 알았던 장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편협적인지,

내가 그동안 만났던 장애인이 얼마나 극소수였는지를

내 아이를 통해서 깨달았다.


내가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던 수많은 장애인들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단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는

위험한 것, 더러운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혼나는 것, 아픈 것, 무서운 것을

전혀 모르는 아이 같았다.


똥과 오줌을 마구 만져댔고,

찻길이고 어디고 손을 뿌리치고 뛰어가고 도망갈 궁리를 연신 해댔고,

흙, 돌, 찰흙, 고무, 옷깃 뭐든 입에 들어갔고,

우는 시늉도 짧았고 어쩌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간지럼조차 타지 않고 무표정이 되어갔다.

물론 높은 곳을 올라가거나, 물장난을 치거나, 뽀로로를 볼 때면 그나마 표정이 나았지만

같이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연신 들었다.

그런 날이면 더더욱 무서워졌다.


아이는 만 4세가 되도록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어쩌다 내는 소리는 마치 둔탁한 쇠막대로 나무판을 긁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내 속도 내 머릿 속도 긁어놓아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낮 동안 내는 소리도 겨우 참았지만,

밤낮이 바뀌어 잠 못 드는 날이면 그런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그때 당시 살던 집은 1층이 아닌 데다가 유난히 층간소음이 잘 들렸던 집인터라,

아이가 밤 11시고 새벽 1시고 깨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옷을 여러 겹 입혀 아이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했다.

자동차는 아이에게 소리 내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 슬퍼했고,

예측할 수 없는 아이를 무서워했고,

미래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임에 좌절했다.


그렇게 자꾸자꾸 나는 가라앉았다.

천지분간 못하는 아이와 둘째를 가져 만삭이 된 나를 보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둘째 임신 6개월에 아이의 자폐 의심 소견을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닥에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 살고 싶어진 것 같다.

억울해서라도 살아보고 싶었고, 잘 살아보고 싶었다.

내 업보든, 팔자든, 운명이든, 우연이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맞서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 죽을힘으로 한 번 살아보자.

나는 그때부터 뭔가를 해봐야겠단 들었다.

기록을 하기 시작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걱정과 좌절할 시간에 고민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달라지고 있었다.


불안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목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목표대로 못 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목표는 목표대로 적었고,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적었다.

마치 적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 마냥 계속 적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최소한 내가 옴짝달싹 못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발버둥이라도 할 수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나와 아이가 아주 작은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음을 확신했으니까.


아이를 지켜낼,

아이를 책임질,

아이의 진짜 엄마가 되고 있었다.


KakaoTalk_20231010_015302127_02.jpg 우리에게 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었던 순간을 기억해야 했다.


KakaoTalk_20231010_020048858.jpg 아이를 위한 기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위한 기록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나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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