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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미 Jan 25. 2022

리틀포레스트

나만의 작은 숲 찾기


"아, 나도 귀농이나 해볼까."


사람들은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


아침이면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뜨고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시골집과 작고 소중한 나만의 텃밭, 친환경 재료와 함께 하는 요리까지


도시에 사는 모두가 한번쯤 꿈꾸는 시골의 낭만.


이 시골의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가득 담아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바로 김태리 주연의 '리틀포레스트'이다.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힐링과 대리만족을 주었고 나역시 지칠때 가끔 찾아 보는 최애 영화가 되었다.



퇴사 하기 전 다짐했던 것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혼자 떠나는 제주 여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리틀포레스트였다.


나만의 리틀포레스트는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외할머니집으로, 작은 '리' 단위의 마을이다.


할머니 집은 지어진지 60년 정도 된 보통의 시골집이다. 종가집이지만 으리으리한 전통 한옥의 종가집은 아니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떡을 빻고 된장과 두부를 만들던 그런 보통의(?) 집이다. 지금은 편의에 따라 리모델링 했지만 어렸을적에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던 큰 대청마루에서 자주 놀았던 기억이 난다.


ㄱ자로 된 본채에 1자로 된 창고겸 외양간과 조그만 돼지우리와 닭장 그리고 넓은 논밭까지. 여름이 되면 참외밭 한가운데 있는 오두막에서 참외와 수박을 서리해 먹곤했다. 지금은 집 뒤편에 있는 작은 밭 하나정도를 일구고 계시지만 할아버지가 계셨을 적에는 벼농사를 마을에서 크게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어린이날이 되면 고추를 심으러 할머니댁으로 모이곤 했다. 할머니는 자식이 다섯이었는데 엄마는 그 중 넷째딸이었다. 그렇게 오남매가 어린이 날이되면 자연스럽게 모여 고추를 심고 저녁에는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게 연간행사였다. 유년시절부터 농사일에 시달렸던 오남매가 모이면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주말농장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돼'




3살때 보름정도 외할머니댁에서 지낸 적이 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엄마가 잠시 친정에 나를 맡긴 것인데 그 때의 기억이 꽤나 인상깊다.


부엌 뒤 숲속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수국. 그리고 내 친구였던 하얀 닭한마리


당시 초등학교 앞에서는 병아리를 200원인가 500원인가에 팔곤 했는데 그 중 한마리를 데려와 키웠었다.

병아리가 닭이 되자 닭을 일반 가정집에서 키울 수 없으니 시골 외가댁에 두고 키웠는데 닭이 곧잘 나를 따랐던 기억이 난다.


고작 보름이었지만 나를 데리러온 엄마가 포동포동해진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린 외손녀에게 할머니가 제일 자주 해주셨던 것은 간장계란밥이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가 먹여주는 간장계란밥을 먹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


그 보름간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외가댁이 고향같은 기분이 든다.



걸어서 20분은 나가야 작은 슈퍼가 하나 있고 배달 앱 화면이 '텅'으로 뜨는 지역이었다. 마을에 작은 중국집이 하나 있었는데 '골목 끝집인데요.' 하면 척척 갖다주실 정도 였으니 큰 마을은 아니었다.


제주를 다녀온 후 바로 2주치 짐을 싸서 내려갔다.


시골에 잠깐 내려가 있을 거라는 내말에 친구들은 부럽다고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한적한 마을로 요양가듯 내려간다고 하니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역시 퇴사 전 사내 정치질과 눈치싸움, 기싸움에 지쳐 차라리 몸이 힘들고 뿌린대로 거두는 농사일이 더 낫겠다고 매번 생각했었다.


다들 그런 착각과 기대속에 귀농을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 현실은 매우 다르다는걸 진작 알고있었음에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6시 30분에 아침을 먹고 오후 8시에 자는 일상에 적응하는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이렇게 듣기 싫을줄이야. 바로 얼굴옆에서 지저귀는 듯한 소리에 늦잠을 잘 수조차 없었고 밥상을 두번차리는 일이 번거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할머니 생활패턴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저녁 8시에 잠을 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8시면 할게 정말 많은 시간인데 시골의 8시는 정말 할게 없다. 할머니와 나는 저녁을 먹고 일일 연속극 '빨강구두'를 시청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왜 그렇게 할머니들이 자극적인 일일 연속극에 환호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조용하고 심심한 생활에 연속극만큼 기다려지고 재밌는 일이 없었다. 나도 어느새 빠져들기 시작했고 서울에 와서도 한동안 챙겨보곤 했다.


회사에서는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한 일상이었고, 제주에서는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한 일상이었다면, 여기에서는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한 일상이되었다.


시골은 봄부터 가을까지 허투루 쓰는 시간 없이 바쁘다. 봄에는 작물을 심고, 여름에는 잡초를 뽑고 약을 치고, 심었던 작물들의 갈무리를 하고 나서야 겨울에 한 숨 돌릴 수 있는게 농사일이었다.


특히 가을에는 온갖 작물들을 수확하는 계절이다보니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마침 내가 내려간 시기가 가을이라 일손을 거들 수 있었다.


고추밭에서 썩지 않은 빨간 고추를 따고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포대자루에 가득 담아 분리하는 .


햇볕이 좋은날 마당에 널어 말리고 다시 걷어 고추꼭지를 따고 깨끗한 행주로 닦아야 하는 


깨나무가 바짝 마르면 막대기로 두드리며 하나하나 깨를 터는 


털어놓은 깨를 키질하며 불순물을 골라내고 깨끗이 물에 헹구어 마른 햇볕에 널어 말리는 


그렇게 정리한 깨와 고추를 방앗간에 가져가 고춧가루와 참기름, 들기름으로 짜오는 


겨울 김장 배추와 무우에 비료와 흙을 재정비해주고 묶어주는 


가지와 호박과 오이를 따다 썰어 하우스에 널어 말리는 


차고 넘치는 야채와 과일을 처리하는 


가지만 남은 고추대를 뽑고 밭의 비닐을 정리하는 일


바짝마른 깨나무 터는 중


정말이지 나는 호박이 그렇게 빨리 크는지 몰랐다. 분명 어제까지는 주먹만했던 호박이 자고 일어나면 얼굴만해지는데 다른 호박인 줄 알았다. 매일매일 자라나는 호박들을 처리할 일이 없어 호박을 썰어 말린 후 냉동실에 넣어놨는데 그렇게 들어간 채소들이 어찌나 많은지 할머니집은 냉장고가 4대였는데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아침일찍 아침밥을 먹고 오전 내내 일꾼처럼 일하다보면 금방 점심먹을 때가 되는데 끼니를 챙겨먹는 것도 정말이지 일이 아닐 수 없다. 밥차리는게 너무 귀찮다는 내 말에 할머니는 갑자기 퀴즈를 내셨다.


"새 중에 가장 큰 새가 뭔지 알어?"


"뭔데?"


"먹새여~"


제주에서는 삼시세끼 내내 사먹는게 일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삼시세끼 내내 냉장고를 파먹는게 일이었다.


앞집 할머니가 주시는 호박과 옆집할머니가 주시는 가지와 오이를 가지고 저녁을 만들어먹고 냉장고 가득 쌓여있는 복숭아와 사과로 잼을 만들어 나눠드렸다.


제주에서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여기서 이렇게 빨리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왼쪽부터 깨나무, 김장배추, 고추나무 (뒤로 보이는 검은 천은 인삼밭이다)


나는 농사일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시키는 일만 해야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몰아서 후딱 끝내버리고 싶었지만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밭을 왔다 갔다 하시는 것 만으로도 힘들어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 속도에 맞춰야했다.


또 비가오거나 구름이 많이 끼는 날에는 깨를 널어 말리거나 밭일이 힘들어서 해가 잘 드는날을 기다리곤 했다. 서울에서는 기다릴 필요가 없던 것들을 기다리려니 답답했다. 해가 없는 날에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고추꼭지 따기, 콩까기, 밤까기, 멸치손질하기 등을 정신없이 하다보면 하늘이 금방 어두워졌다.


한가로울 때 읽을 책들을 가져왔었는데 일하느라 바빠서 서울에 갈때까지 한장도 읽지못했다.


생각보다 할머니들은 힘이 세고 단단하시며 부지런하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콩껍질 까는 법, 깨터는 법, 아궁이에 불지피는 법 등 이것저것 알려주시면서 해주신 말이 있는데


'알아야 시킨다'는 거였다.


내가 알아야 남을 시킬 줄 도 안다는 말이었다. 내가 할 줄 모르면 남이 제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나도 알아야 된다는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는데 한동안 할머니의 그 말이 뇌리에 깊게 남았다.


할머니는 대놓고 손녀딸을 오구오구 우리강아지하고 예뻐해주시는 성향은 아니셨다. 내가 내려온 게 좋으신건지 성가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괜히 짐만 되는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동네 할머니들한테 내가 만든 사과잼과 복숭아잼을 나눠드릴때 그렇게 내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다 큰 처녀가 시집도 안가고 돈도 안벌고 시골에 내려와서 뭣허냐'와 같은 잔소리아닌 잔소리를 자주 하셨는데 처음에는 웃어넘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동네 땅부자 있으면 중매 좀 서주셔~' 라고 말하는 넉살까지 생겨버렸다.


그런 내 말에 할머니들은 '저짝 다방에 가서 괜찮은 놈으로 골라봐~' 라고 맞받아치셨다.




할머니는 2011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 동안 혼자 사시면서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으셨고 나는 그런 할머니가 원래 혼자서도 잘 사시는 짱짱한 분인 줄 알았다.


어느날 혼자 지내는게 심심하고 외롭지 않냐고 물어본 내 말에 할머니는 고스톱을 치시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기대하는게 많아지면 내 마음만 더 상하는 법이야'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된다고 했다. 그게 어떻게 되냐는 내 물음에 마음도 연습을 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면 된다고 말하는 할머니가 조금 쓸쓸해보였다.


나이가 들면 관절이 약해지기 때문에 할머니는 바닥에 앉아계시다가 일어나는걸 힘들어 하셨는데 그때마다 내가 부축해드리는 걸 매번 거절하셨다. 익숙함이 무섭다고 혼자 일어나 버릇해야 나중에 혼자있을때도 기대지 않고 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머니는 내가 있을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해놔야 된다면서 미용실가기, 은행가기, 조합에서 소금 3포대 사기 등 차를 타고 5분,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읍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몰아서 하셨다.


동네미용실에서 할머니들이 많이 하는 뽀글이 파마는 2만원이었는데 아주 짱짱하니 잘해주신다. 할머니한테 뽀글이 파마를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일하다보면 머리카락에 눈에 찔려 여간 거추장스러운게 아니라고 하셨다. 파마가 생각보다 너무 빠글빠글하게 되었는지 연신 나에게 너무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보셨는데 문득 '할머니도 여자였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예뻐서 동네 할아버지들 다 뒤로 넘어가겠다는 내말에 할머니와 미용사 아주머니는 한참을 웃으셨다.


할머니집은 도시가스가 아니라 LPG가스를 여즉 사용하고 계셨는데 가스 아까우시다며 시래기를 삶을 때마다 마당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서 삶으셨다.


할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할 줄 아는게 없으니 제일 쉬운 일(?)을 받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아궁이 불을 떼 시래기를 삶는 일이었다. 불을 붙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아무리 신문지와 마른 나무가지로 공간을 만들어 붙여도 불은 붙지 않았고 눈은 맵고 불 세기 조절은 안되고 짜증이 났다. 부엌에서 편하게 가스레인지로 삶으면 될 것을!


시골은 정말이지 일이 끝이 없었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고 이렇게 몸만 바쁘다고 상황이 나아질리도, 해결될 일도 없었지만 어쨌든 마음은 편했다.


몸이 고되면 생각이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달았다.


가을이 다가오고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은 제주 바다와는 또다른 안정감을 주곤했다. 특히 해질무렵 시골풍경은 정말 예뻤다.


할머니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시질 않았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하시면서도 할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며 계속 일하셨고 나는 그 뒤를 계속 졸졸 쫓아다녔다.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느낀점은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만의 살아온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게 쉽지 않던 시절, 가정을 꾸리고 힘들게 자식들을 출가시키며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만들어 진 것 같았다. 늘어난 주름만큼 쌓인 경험과 습관들이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는 원동력이자 기준이 되어 주는 것이다.


꼰대발언이라고 여겨지는 '라떼는'이 이유있는 '나때는 이렇게 살았었어' 로 들렸다.


그래서 우리가 몇십년 된 후라이팬과 믹서기를 버리라고 해도, 냉장고 가득 쌓여있는 음식들을 버리라고 해도 배를 곯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까워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농사일이라는게 1년동안 정성들여 키운 내새끼들이기 때문에 감히 쉽게 내버릴 수 없었다. 나 역시 깨를 터는데 깨 한톨 떨어지는게 어찌나 아깝던지 싹싹 긁어모았었다.


깨를 짜고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하고 얼어 죽은 호박밭을 정리하고 밭에 널부러진 비닐과 나뭇가지들을 정리한 후에야 어느정도 가을 걷이가 끝이났다.


할머니집 뿐만 아니라 앞집, 옆집, 언덕위집 할머니들의 자잘한 심부름이나 일거리를 도와드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앞집 할머니의 고구마 캐기 메이트가 되기도 했다.


2주 쯤 지나자 동네에서는 골목 끝집 손녀딸이 야무지고 일도 잘하더라는 소문이 나있었고 시골에 내려갈때마다 나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마을 입구부터 지나가는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들을 나를 볼때마다 괜찮은 혼처가 있었는데 재작년에 장가를 갔다면서 더 빨리 나를 알지 못한것에 대해 엄청나게 아쉬워들 하셨다.


사실 어르신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주변에 존경할만한 어르신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의 고집은 꺾을 수 없이 세고, 서로 존중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면 그 전부를 이해하고 좋아하듯이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고 어르신들을 존경하게됐다.


공통된 추억과 경험이 없기에 어르신들과의 간격은 점차 벌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지 않는 이상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르신들이 말하는 '요즘애들은 고생을 안하고 살아서'의 고생은 생존이었음을,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요즘애들의 치열한 경쟁을 어르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젊음이 상이 아니고 늙음이 벌이 아니 듯 우리는 언젠가 나이가 들고 노쇠해지며 맘 같지 않은 몸을 갖게 될 것이고 젊은 날의 추억을 꺼내먹으며 살 날을 향해 가고 있다. 그 길에 어르신들의 경험은 젊은이들의 삶의 이정표가 되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콩을까며 웃으며 하시던 이야기들에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저렇게 웃으며 얘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과 시간이 흘렀으며 묵묵히 견뎠을 그녀들의 인생을 이제 30년 살아온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남편의 폭력과 바람 그리고 배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일, 먹을게 없어 나무껍질을 고아 삶아 먹던 시절, 3명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얘기 등 그 시절엔 다 그러고 살았다며 홀홀 웃어 넘기는 그녀들이 새삼 대단해보이고 단단해보였다. 그러면서 또 문득 왠만한 일일 연속극이 아니고서야 그녀들의 관심을 끌 수 없겠구나 싶었다. 그녀들이 살아온 인생이 더 스펙타클 했으므로.


바쁘게 살아온 서울에서의 생활과는 반대로 어르신들의 속도에 맞춰 생활했던 시골생활은 나에게 묘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편안함 같기도 하고 불편한 성취감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어르신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할머니 말을 안듣고 내 방식대로 해보겠다며 도전한 일들이 몇개 있었는데 결국엔 할머니 말이 전부 맞았다.


세상에 허튼 경험은 없으며 그 경험들이 쌓여 각자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준다는 것, 나와 내 주변을 정돈하고 가꾸는 일은 작은 일이지만 큰 변화를 가져다 준다는 것, 흙과 나무는 가까이 둘 수록 좋은 것,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요리 한다는 건 멋진 일이라는 것, 서울은 진짜 살기 편한 도시라는 것, 그래도 꼬리달린 쥐보다는 벌레가 나은 것, 나만의 작은 숲을 가져야겠다는 것


현실적인 문제들과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은 기분이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말랑해진 곶감을 주무르며 혜원의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겨울이 와야 단 감을 먹을 수 있는 거야"


곧 봄이 되면 또 고추장을 만들러 내려가야 된다.


봄이 되기전에 취업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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