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이민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 그래, 그건 맞아. 하지만 사람들이 항상 하는 소리가 있지.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항상 끔찍한 소리를 해. 나한테는 그게 평범한 일상이야..."
그들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아우르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지 않는 삶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위안부, 문화 정치, 광복 등을 주로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이주민들의 삶을 상상해보고 그들이 느꼈을 사회의 부조리와 격렬한 혼란 속에서도 살고자 했던 그들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었다.
양진의 혼인 담을 비춰주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녀의 딸 순자와 순자의 자식들 그리고 순자의 손주들의 삶까지 4대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긴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하는 그들의 삶과 그 안에서도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편견을 보여준다.
# 고단한 여자의 삶,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다.
순자의 엄마, 양진은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도 과부가 된 순자가 자식들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며 살아가고, 경희 또한 자신의 남편 요셉,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양진까지 극진하게 돌보는 장면들에서 과거에서부터 끊이질 않는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특히 경희의 남편 요셉은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강압적으로 표출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경희가 집안일이 아닌 외부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부정했으며, 자신이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는 오랜 시간 쌓여 깨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암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들을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많은 형상의 남성들이 스쳐 지나가듯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읽는 독자임과 동시에 여자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이 글의 배경에서 40년은 흐른 지금에도 이러한 생각들이 주변에 만연하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었다. 생각과 편견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 순자의 아빠, 훈이의 언청이처럼 유전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물림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달픈 여자의 인생은 이러한 무의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한다. 씁쓸하지만 변화는 느리고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 고단한 이방인의 삶,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모자수가 그의 일본인 친구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재일교포들이 겪는 현실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은 그의 형인 노아도, 그의 아들인 솔로몬도 겪는 일이다. 하지만 비슷한 일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와 솔로몬은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노아는 변화의 돌파구인 교육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며, 당시 조선인으로서 가기 힘든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남몰래 꿈을 키워간다. 노아는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는데,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그는 현실을 깨닫고 본인의 진실을 묻고 살아간다. 와세다 대학을 자퇴하고 나가노에 간 노아는 부모님을 잃은 일본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추구하지 않았던 파친코의 관리인 일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노아의 죽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노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흘러가듯 살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순자가 찾아왔을 때, 순자를 보내고 총으로 자살하는데 노아에게 엄마와의 재회는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현실의 모든 것을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솔로몬은 개방적인 분위기의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학위를 따며, 영국 은행에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받았다. 솔로몬은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뒤 모자수에게 자신도 파친코에서 일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말한다. 모자수는 자신의 아들이 조선인들이 받는 그리고 파친코에서 일을 하면서 받는 편견의 시선들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반대하지만 솔로몬은 더 완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뿐이었다. 솔로몬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받아들인다.
이방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상황에 따라 타인에 의해 휘둘리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진실된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내가 스페인에 있었을 때, 스페인에서 태어난 중국 여자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여자 아이는 자신을 스페인에서 태어난 중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초점을 둔 것이다. 그녀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에는 가족의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직까지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외형적인 면만 보고 평가하는 편견의 시선은 어디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길, 만약 내가 교포였다면 나는 나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할지 내가 태어난 나라라고 생각할지 고민해 보았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나'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 인생과 시대는 계속 흘러간다.
소설은 순자가 이삭의 묘를 찾아가 이삭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나에겐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다.
'순자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경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닌 문장이지만 그들의 삶은 똑같이 계속 흘러가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마 이들의 삶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솔로몬이 순자의 나이쯤 되지 않았을까. 솔로몬의 자식들도, 손주들도 같은 편견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며 살아갈 것인가. 그들의 삶에 대해 그들과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 소설은 재외교포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다른 이방인들의 삶에도 대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다른 나라의 교포들뿐만 아니라 유학생들 혹은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 그리고 다문화 가정 등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순자와 노아,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이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