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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환 Jan 24. 2021

#4.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나의 밭이 아닌 우리의 밭 가꾸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나는 도대체 어떤 것이 더 불행한 삶인지 알고 싶어요. 검둥이 해적들한테 1백 번이나 겁탈당하는 것, 엉덩이 한쪽을 잘리는 것, 불가리아인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것, 종교 화형식에서 죽도록 매 맞은 다음 교수형을 당하는 것, 교수형 당한 후 다시 해부당하는 것, 그리고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겪은 이 모든 고난에 비해 아무 할 일 없이 이곳에서 지내는 일이 더 행복한 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지요."


이 소설은 비현실적인 우연들과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며, 굉장히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허무맹랑하고 앞뒤 안 맞아 보여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 '철학소설'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비해 가볍게 느껴지며, 전체적으로 읽히는 속도감이 빨랐었다.


아주 순진한 정신의 소유자 캉디드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툰더 텐 트롱크 성에서 쫓겨난 후로 험난한 모험을 하게 된다. 그는 그의 앞에 닥치는 고행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경험하게 된다.


#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최악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는 이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겪는 고난과 역경도, 그리고 자유도 세상의 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사건, 사고들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고, 교수형에 처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등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러한 고난들을 통해 캉디드가 팡글로스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르틴이라는 비관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데 이 과정에서 캉디드는 마르틴의 생각을 따라 점점 비관론적으로 변화하다. 마지막에 회교 승려의 말들을 듣고 현실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캉디드의 사상은 시간의 흐름과 다양한 사건들의 연결들로 인해 생각이 변화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과정들을 통해 어떤 사상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모든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하나의 생각을 전제로 삼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 위험(?) 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맞물려 있는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도 받아들이고 변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고, 최악으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 공존하는 것이다.


# 불행은 왜 모두에게 존재하는가?

불행에 대한 이야기는 엉덩이 한쪽이 잘린 노파의 구절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노파가 캉디드와 퀴네공드와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 서로의 불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노파가 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의 인생을 저주해 본 적이 없거나,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자신을 바다에 빠트려도 좋다는 내용이고, 다음으로는 모든 고난들이 마무리가 되고 나름의 평화를 찾았을 때, 왜 전에 겪었었던 불행한 상황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냐는 구절이다.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부분들이었다. 예전에 생각했던 상황들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굉장한 행복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는 상황인지 마음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고민된다. 모든 요소적인 부분들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많은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 우리의 밭, 공존과 포용을 향하여.

책의 마지막에 캉디드는 " 저는 우리의 밭을 또한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구절을 인간의 노동적인 부분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공동체의 형성에 대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상의 인물들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것을 진리로 생각하며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계속해서 변화시켜나가는 인물도 있다. 이렇듯 우리의 사회(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로 형성되어 있는데 그들과 공존하고 나아가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표현하는 비유라고 받아들였다.


공동체 중심의 과거와 다르게 요즘에는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밭은 다시 공동체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닌 개인의 행복과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의 행복과 가치관을 유연하게 받아 들고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는 책에서 접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들과는 다르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삶이 비참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기보다 다른 인물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을 당연시한다거나 성적 노리개 역할로 주로 등장하는 것은 독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복잡 미묘한 슬픔을 느꼈다. 이 부분 또한 공존과 포용으로 가기 위해 앞으로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 나를 이루는 주변과 내가 속해있는 사회와 조화롭게 공존하고 포용한다는 것에 대해 시야를 확장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명답은 아마 평생을 거쳐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과 과정에 집중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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