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4
점심시간이 막 시작될 무렵이면,
진료 시작보다 한 시간쯤 먼저 도착해
물리치료를 받고 가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큰일이 없는 날이면
그분은 언제나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렸고,
진료실은 그분의 인사로 문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기자 명단 가장 위에 있어야 할 그분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기셨나—
그렇게 생각한 채
진료는 평소처럼 흘러갔다.
한참이 지나,
간호사 선생님이 문을 열고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원장님, 그 할머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진료가 누락된 것 같아요… 어쩌죠?”
들어오신 할머님은
평소처럼 웃고 계셨지만,
표정 어딘가에 조심스러운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속상한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고 계신 듯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진료 시간이 다 되어 급히 들어온 분이
“본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니 먼저 진료를 봐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했다.
그 억지스러운 상황 앞에서
할머님은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순서를 내어주셨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조금 더 기다리는 일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할머님은
그 순간,
본인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진료 순서에서 누락된 채,
영문도 모른 채 순수하게 기다리고 계셨을 모습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미안해졌다.
선한 일을 해도,
무언가를 기꺼이 내어주어도,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비정한 현실 앞에서
진료실이 그 무심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이 세상은
소리보다 조용함을,
주장보다 배려를
더 늦게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할머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원장님, 감자 하나 드실래유?”
뜻밖의 말에 당황하자
그분은 검은 봉지 안에서
삶은 감자 하나를 꺼내 건네주셨다.
손으로 직접 껍질을 까신,
어느 부분은 다 벗겨지지 않은 감자.
어릴 적,
우리 할머니가 쪄주셨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와서
기분 좋게 돌아가셨어야 할 분인데,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시간과
그 마음을
조용히 내어주셨던 그분의 눈빛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유 어머님, 죄송해요.
다른 분께 순서까지 양보해주셨는데
이렇게까지 밀려버려서 속상하셨겠어요.”
어머님의 허탈한 마음이
진료실 문을 나서고 나서까지 남을까 봐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마음조차도 일종의 보상 심리였던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다.
“에유,
매일같이 온 지가 몇 년째인데,
기억나면 불러주시겠거니 했어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네 어머님— 감자 하나 주세요.”
사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게 어머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일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먹었다.
다행히 할머님도 웃으셨다.
눈빛은 어느 때보다 동그랗고,
마치 설레는 아이처럼 기뻐 보이셨다.
정작,
허리 상태는
크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셨던 할머님 쪽이
훨씬 더 심각했다.
우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저마다 자기 필요를 먼저 챙기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면,
가장 단순하고도 소중한 가치를
놓치고 살아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의 시선과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주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타인을 위해 마음의 한켠을 내어주는 일과,
아무런 이해득실 없이
내가 가진 전부를 조용히 건네는 일은 분명 다르다.
우리는 흔히,
모든 생각과 행위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는
'주는 만큼 돌아온다'는 이치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는 값진 물건으로,
어떤 이는 자신의 시간과 수고로
저마다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을 꺼내 놓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저편에는
작든 크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기대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의 ‘착한 행위’에도
그런 바람이 묻어 있다.
좋은 말, 좋은 행동의 이면에는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소중한 존재로 남고자 하는 기대,
그리고 어쩌면
고차원적인 계산과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바람이 동시에 스며 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했음에도,
원하는 반응이나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할 때,
마음 한구석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남는다.
그저 주고자 했던 것인데도,
내가 허락한 그 마음에 대해
상대의 무심함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내면은 어느새 그 사람을 향해
조용히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 정도는 알아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했으면, 뭐라도 돌아와야 하지 않나.’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중요한 것을 내어놓고 허락하는 마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조금 부족해져도,
희생되어도,
손해를 보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은
익숙하거나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마음의 태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응원해주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효율과 이익이 우선시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 된
이 시대 속에서
‘그저 주는 일’은
때로는 순진하거나 비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태도,
계산 없는 따뜻함,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가장 인간다운 시선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저 그 사람이라서 마음을 내어주는 일.
그 조용한 용기가
우리를 사람답게 하고,
서로를 지탱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쩌면,
그 잊고 살아가는 것들 안에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To give and not expect return, that is what lies at the heart of love.”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 Oscar Wil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