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불에서 익어가는 것들
나는 일주일 중 수요일과 목요일을 유독 기다린다. 화려한 휴일도 특별한 약속도 아닌 동네마트의 '수목돌풍' 행사 때문이다.
이번 행사기간 중 내가 꼭 사고 싶었던 것은 바로 고구마였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갔던 군고구마 장수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는 연인을 찾듯 수북이 쌓인 고구마 쪽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동안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탓일까. 그날따라 녀석들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오늘 나는 고구마계의 엄격한 스카우터, 헤드헌터였다.
냉정하지만 고구마 세계도 만만치 않은 경쟁사회다. 우리 집 찜통 무대에 세울 주인공들을 뽑기 위해 나는 엄격한 심사위원이 되어야 했다.
"음... 너는 크기는 괜찮은데 색이 조금 애매하네."
"너는 모양은 예쁜데 너무 무르다."
나의 심사평에 고구마들이 바짝 긴장한듯했다.
우선 겉이 매끈하고 모양이 반듯한 것들을 1차 합격자 명단에 넣어두었다. 너무 크면 속에 심지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작으면 맛이 덜 여문 경우가 많아서 손바닥 한가득 들어오는 중간 크기를 골랐다. 또한 색이 고르고 눈(싹)이 나지 않은 것들이어야 했다.
행여나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하나씩 들어서 무게감도 확인했다. 너무 가벼우면 수분이 빠져 퍼석할 확률이 높고, 묵직한 녀석일수록 속이 알차고 당도를 기대할만하다.
마지막으로 조금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녀석들을 몇 개 골라 담았다. 경험상 그런 아이들이 삶아보면 의외로 맛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수확이 주는 작은 기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고구마를 물에 담그고 솔로 살살 문질러 흙을 씻어냈다. 깨끗해진 녀석들을 냄비에 차곡차곡 넣은 뒤 중 약불에 올렸다.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며 냄비 속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의 바람은 무척 소박했다. 그저 잘 익은 고구마 한 알을 맛있게 먹는 것.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며 은근하게 달큼한 향이 주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불을 약하게 낮추고 물이 자박해질 때까지 천천히 삶으며 그 맛과 향이 한층 더 깊어지길 기다렸다. 진하게 스며든 단맛은 여유의 결과물이다.
고구마가 아직 덜 익은 순간과 완전히 익은 그 사이. 그 틈을 채우는 시간은 느리면서도 선명했다.
천천히 익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여물어 가는 여유와 고요함을 느껴보았다.
고구마가 다 익자 한 알을 꺼내 작은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노랗게 드러난 속살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후후 불어가며 베어문 고구마 한 입,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서 온몸으로 번졌다. 오물오물 씹는 내 입안에 단맛 같은 행복이 가득 찼다.
스스로에게 준 소박한 선물이자 소소한 축제였다.
고구마를 삶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겉모양을 기준으로 열심히 따졌지만, 정작 사람도 고구마도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속 깊은 맛을 품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고구마를 대하는 일이 사람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좋은 사람, 좋은 일, 그리고 좋은 관계는
불을 세게 올린다고 빨리 완성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내 삶의 중요한 것들도 약불에서 서서히 익어왔다.
숨 가쁜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고 단순한 충만함을 되돌려준 고구마의 온기가 내게 속삭여준다.
"조급해하지 마. 너도 지금 맛있게 잘 익어가고 있어"
고구마 몇 알과 차 한 잔이면 충분했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