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빨간 쿼카의 병가일지

EP.12- Spring 그리고 첫눈

by 볼 빨간 쿼카

오늘은 수요일에 즉흥적으로 상담을 받고 등록한 피아노 레슨 첫 날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병가때가 더 바빠서인지 요즘은 아침에 일찍 눈뜨기가 힘들다. 그래서 알람을 미루고 미루다가 레슨이 10시인데 9시 35분에 눈을 떴다. 이럴수가. 10시 레슨 후에 11시 30분 운동이기때문에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아침약을 먹고 운동복을 챙겨입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10시에 딱 맞추어 학원에 들어갔다. 학원 선생님은 이제 두 번째 만나는건데 오래된 친구처럼 맞아주신다. 요즘 내 취향인 환대받는 학원을 잘 고르는 능력이 생긴걸까. 좋다. 자칭 I 수집가라는 외향적인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레슨을 진행했다. 첫 날이니 내가 어느 정도 단계인지 확인해보고 그에 맞는 선곡을 해주셨다. 초등학교 6년 동안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나는 얼추 악보는 볼 수 있어서 선곡을 해보았는데 처음에는 ‘몽라의 Paris, Paris와 하이포의 봄, 사랑, 벚꽃말고‘로 정했다.

첫 연습곡은 몽라의 ‘Paris, Paris’, 악보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손을 스타카토로 끊어주는 것이 더 노래와 잘 어울린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스타카토로 쳤을 때와 그냥 쳤을 때를 비교하여 연주해주셨다. 세상에나! 너무 멋있다. 악기 연주하는 사람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또 한 번 연주자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내 차례가 왔다. 오랜만에 치는 피아노라 떨렸다. 먼저 왼손을 쳐봤다. 선생님의 생각보다 악보를 잘 보았는지 오른손을 따로 하지 않고 바로 양손 연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악보라 틀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선생님 기준에서는 처음치고는 잘 연주한 것이었는지 이렇게 악보를 읽을 수 있으면 ‘봄, 사랑, 벚꽃말고’는 너무 쉬울 것 같다며 다른 곡을 선곡하자고 하셨다.

다른 곡으로 세 곡을 추천해주셨다. 탱고를 출 때 나오는 음악으로 기억되어 있는 ‘Carlos Gardel의 Por una cabeza‘, 장화홍련OST로 유명한 ‘이병우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그리고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히사이시 조의 ‘spring’이었다. 세 곡 모두 좋았다. 그런데 처음 두 곡을 들을 때는 ’좋다-‘ 정도였다면 히사이시 조의 ’Spring’을 들을 때는 ‘좋다! 멋있어! 치고 싶어!‘라는 좀 더 적극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이것 저것을 경험하며 좋아진 것은 나의 취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의 나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성격이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뭘 대답해야할 지 난감했다. 좋아하는 것이 뚜렷한 친구들을 보며 나는 무색무취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들이 있었는데 이래도 흥, 저래도 흥으로 지내다보니 나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잘 표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금씩 나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의 취향을 깨닫고 나를 설명할 키워드를 찾을 때 행복하다. 오늘 히사이시 조의 ‘Spring’을 들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첫 날 레슨 곡은 ‘몽라의 Paris, paris와 히사이시 조의 Spring’으로 정해졌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는 피아노로 연주해봤는데 ’Spring’도 있었고 이렇게 좋은 곡이었다니! 좋은 곡을 알게 되어 기쁘다.

두 번째 연습곡 ‘히사이시조의 Spring’은 첫 번째 연습곡보다 확실히 난이도가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오른손 왼손 악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실수를 참 많이도 했다. 이 곡은 단조로 전조 되는 부분 먼저 레슨을 받았는데 처음에 참 어려웠다. 오른손 악보에 익숙해질만 하면 왼손 악보를 보면서 헤매고 이제 좀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싶으니 손에 힘을 빼고 오른손은 특히 굴리듯이 쳐야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꾸준히 연습해서 완성하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처음 봤을 때 헤매는 정도를 골라야 나의 난이도에 맞는 악보라고 알려주셨다. 레슨 없이 혼자 칠 때는 내가 한 눈에 보고 칠만한 것들만 골랐는데 레슨을 받으니 좀 더 향상되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줘서 참 좋다.

레슨을 마치고 운동 가기 전까지 연습실에 가서 연습하며, 초등학생 때는 아무 생각없이 다녔는데 피아노가 이렇게 재밌는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시작하는 것들은 어릴 때 해 본 것이라도 다르게 다가온다. 어릴 때도 싫진 않았지만 지금은 더 행복하게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다. 연습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린다. 올해 첫눈이다. Spring과 첫눈, 같이 존재할 수 없지만 왠지 잘 어울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괜히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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