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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09. 2019

여자애가 털이 많아 어쩌냐?

가지런한 털은 예쁜 거야.

딸애가 중1쯤이었을 것이다. 목욕탕에 들어가더니 문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나오더니 팔다리 여기저기 면도기에 베인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  딸애는 태어날 때부터 털이 많았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아니라 진짜 새까만 털이 팔, 다리, 배, 등까지 가지런히 났다.


전남편은 애가 어릴 때부터 '여자애가 털이 이리 많아 어쩌냐?'며 걱정을 했다. 그 말을 귀가 따갑게 들은 딸이 마침내 면도를 결심하고 혼자 해결을 해 보려다 여기저기 밴드를 붙이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도 딸은 열심히 면도를 했다.


대학을 간 후, 어느 날 딸이 집에 왔을 때였다. 팔에 털이 소복한 걸 한쪽 방향으로 가지런히 정리를 하더니

"엄마, 털을 이렇게 잘 정리하니까 예쁘지? 내 친구가 그랬어. 내 팔에 털이 너무 예쁘다고."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 들어보니 이랬다. 딸 친구의 엄마는 자기의 딸이 털이 많으니 항상 털을 흩트리지 말고 가지런히 눕히라고, 그럼 그건 굉장히 예쁜 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친구는 우리 아이에게 팔의 털을 한 번 가지런히 쓰다듬어 주더니, "봐! 예쁘지?" 하더란다. 그리고는 후루룩 흩트리더니, "이건 안 예쁘잖아." 했단다.


딸은 깜짝 놀랐고, 평생의 열등감인 털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예쁜 것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설정을 해 주니 정말 가지런한 털이 예뻐 보이더란다.

 

아이들이 어려서 이혼을 한 나로서는 애들이 열등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많이 소심했었다. 나는 내가 열등감을 가르친게 더 있지 않을까 싶어 아찔했다.

딸아이 친구의 엄마는 참 잘 가르쳤구나 싶었고 나는 왜 그생각을 못했을까,  반성을 했다.


딸애가 5학년 때부터 나랑 살고 아들은 아빠와 살기 시작했다. 이혼 후, 친정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1년 후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누워계신 상황이었다. 딸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쓰러지셔서 중3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나는 참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있었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있기도 했고, 우리가 엄마네 집으로 가기도 하는 어수선한 생활이었다.


어느 날 딸애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불쌍해? 동네 할머니들이 왜 자꾸 나한테 딱하다 그래?"

"생각해봐, 밖에서 보면 그럴 수 있어. 엄마, 아빠는 이혼했지. 남동생과 떨어져 살지, 외할머니는 아파서 누워계시지. 얼마나 딱한 상황이야? 근데 우리 불행해? 우리 맨날 웃지? 그럼 괜찮아."

"엄마 말 들으니 우리 진짜 불쌍한데, 우리 재밌게 웃으며 잘 사네." 했다.


열등감은 내가 객관적으로 잘 났어도 본인이 더 나은 누군가와 비교하면 끊임없이 생성된다. 아이는 별로 느끼지 못하는 걸 옆에 있는 어른이 부끄럽게 느끼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보내는 색안경과 아프게 하는 말들을 집에서 부모가 미리 경험하게 해 주는 꼴이다.


생각해 보면 장점이나 단점이나 같이 오는 것이다. 딸아이가 털이 많아 고민을 했지만, 몸에 털이 많다는 것만 보면 단점일 수도 있다. 그것도 나중엔 예쁘다고 관점을 바꿨지만. 팔다리에 털이 많을 뿐 아니라, 머리숱도 많고 눈썹, 속눈썹도 길고 풍성하다.


이혼을 해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산 아이들이지만, 엄마 아빠의 불화를 덜 겪으며 살았다. 궁색한 장점이긴 하지만.  아픈 외할머니를 간호하며 119에 실려 가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외할머니의 죽음을 가까이서 겪음으로써 딸아이는 성숙해졌다.


몸에 털쯤이야 생각하나 바꾸니 예쁘게 보일 수도 있는 작은 일이지만, 가정사나 외모, 성격에 관한 열등감이라면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열등감은 이미 집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가르쳤을 수 있다. 세상이 줄 걸 걱정하며 미리 주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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