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피웠으면 영원히 들키지나 말든지. 들켰으면 조용히 수습을 해야지, 경찰까지 개입되다니.다 됐고, 직장은 짤리듯이 사직하고 이사까지 하게 만드는 남편이 세상에 어딨냐? 친정식구, 내 주변에는 명예퇴직후 낙향을 했다고 둘러댔다. 시댁 식구들은 사실을 다 알지만 아들을 감쌌다. 여우 같은 여자에게 홀려서 그렇게 되고 마누라가 싹싹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은근히 나를 탓했다. 그러면서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니 그냥 봐주란다.
이혼을 냉큼 할 주제도 못 되는 게, 내가 이혼한다고 하면 나보고 더 참으라고 할 게 분명해 보이는 친정, 두 살 세 살 된 두 아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누가 돈 내고는 안 살 한복과 홈패션 소품들 만들기. 난감하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애 둘 딸린, 남편이 바람을 핀, 딱한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한 여자로서 좌절감도 왔다.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다는 느낌, 그 누구랑도 이제는 진심 어린 염려와 장난, 웃음 이런 걸 할 수 없겠다는 좌절감은, 마치 동굴로 휙 던져져 쑥과 마늘만 먹어야 하는 곰이 된 느낌이었다.
고향 동네로 이사를 와 전셋집을 구하는 데 명의를 내 이름으로 해 준다고 했다. 약간 위안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금방 헤헤 웃으며 '고마워'하고 평상심으로 살 순 없지 않은가? 어디하나 말할 곳이 없어 일기를 쓰는 게 다였다. 일기도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다 쓰자니 내가 부끄러워 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 힘들다.', '아, 그만 하고 싶다. 이 생활.' 이게 다였다. 그러다 몇 줄씩 더 써가기 시작했다.
전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내가 분이 풀어지려면 최소1년은 걸릴 것 같고, 1년 간 열 번은아무리 화를 내도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달라고 했다. 전 남편은 내가 화를 내면 자기는 더 성질을 부리며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럼 다섯 번 만 무조건 빌어라. 전남편은 의식적인 순간 모면을 위한 사과는 했지만, 내가 예고 없이 내는 짜증은 티끌만큼도 받아 주질 못했다. 세 번으로 줄였다. 그것도 못하고 번번이 내 화의 두세 배가 되는 화를 냈다.
한 번은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하는 재롱잔치의 첫인사를 한다고 했다. 나는 기쁘게 밤을 꼬빡 새워 한복드레스를 만들어 줬다. 재롱잔치 날이 전남편의 생일이었다. 난 아침에야 잠이 들어서 미역국을 끓여 주지 못했다.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았다고 사람을 볶아대며 억지를 부렸다. 저녁에 상을 차려 주겠다며, 미안하다고 했다.계속 잔소리를 해 대니 참을 수가 없어 나도 한마디를 했더니 큰 싸움이 되었다. 애들 할머니와 할아버지,삼촌까지 재롱잔치에 왔는데 전 남편만 안 왔다. 분노가 또 올라온다. 백번 이혼 잘했지.
내 일기장은 전남편 '치부 노트'였다. 그날 남편은 또 하나 치부를 추가한 것이다. 치부 노트에 기록을 한 것은 내 숨구멍이었고, 뭔가 더 소소하게 복수할 방법이 필요했다. 가장 큰 복수는 이혼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 날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살기엔 내가 피폐해 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했던 일상의 복수 모음전을 해 보자.
1. 생활비에서 내 용돈 만들기-나중에 재산 분할과 위자료 청구를 할 때 인지대금으로 요긴하게, 전남편 입장에서는'욕이나게' 쓰였다.
2. 시댁 행사에는 어떻게든 안 가기-일주일 전부터 내 눈치를 보며 살살거리는 게 빤히 보였다. 뭔가 싸움거리를 만들어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어 가지 않았다. 남자 혼자 친척 결혼식에 가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가? 시어머니도 이건 괘씸해했지만 염치는 있는지 강요는 못했다.
3. 낮시간에 혼자 웃긴 영화보기-맨날 우울해하면 나만 손해. 웃긴 영화를 봐도 처음에는 민망해서 웃음도 목구멍에 걸려 못 나왔다. 그러다 나중에는 좀 과장해서 웃게 되더라. 그때 '투캅스'를 오전에 봤던 기억이 난다. 혼자 실컷 웃고 들어와, 심각하게 남편을 맞이했다.
4. 남편 칫솔로 변기 청소하기-저녁에 그 칫솔로 이 닦는 걸 보니 어찌나 통쾌하던지.
5. 냉이 안 씻고 국 끓여주기-내꺼랑 애들꺼 한그릇 먼저 퍼 놓고 안씻은거 한 웅큼 넣고 한 소끔 더 끓이기.흙이 바드득 씹힐 때 가식적인 사과.세제라도 한 스푼씩 넣었어야 했는데 착해 빠져서 .
6. 니트 옷에 시침핀 몇 개 꽂아두기-처음엔 실수로 시침핀이 빨래에 떨어졌는데 나중에 고의로 뿌림. 옷을 입을 땐 모르다가 입고 다니다 보면 세게 찔린다. 니트에 시침핀이 꽂히면 찾기도 힘들다. 벗을 때 목쯤에 확 긁히면 아, 통쾌.
7. 차 트렁크에서 짐 내릴 때 트렁크 문으로 확 내려치기-못 봤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지만 겁나 통쾌. 뒤통수를 한참 '아이고 아파라' 하며 어루만지더라.
적어 놓고 보니 이렇게 미운데 3년 반을 어떻게 살았나 싶다. 애당초 저런 남자와 왜 결혼을 했나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전남편의 찌질한 본성은 외도를 들킨 후에 맘껏 드러났다. 외도를 들키기 전까지는 그냥 보통 남편이었다. 혈기가 있지만 조금만 칭찬해 주면 청소, 설거지, 애기 목욕은 도맡아서 하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챙피하고 불안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의 마음까지 돌 볼 여유는 없었다.
치부책에 남편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하며, 소소한 복수에 꼬소해 하며, 남편 돈으로 경제적 독립 준비를 하며, 그렇게 버텼다. 내 멘탈 관리를 위해 남편이 없을 땐 최대한 많이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