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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16. 2019

남편의 외도를 알고 난 후 달라진 것들

어미야, 남편 기를 죽여서야 되겠니?

전남편은 생활 습관이 건강했다. 술 담배를 안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집안 환기와 청소를 자주 했다. 부지런한 점은 장점이었으나 입으로 끊임없이 잔소리와 비난을 하니 장점을 다 까먹는 스타일이었다. 자신의 습관이 반듯하니 모든 일에 서투른 나는 전남편의 지적에 논리적 반발을 잘 못했다. 군대에서 요리 병사도 했었다는 전남편에 비해 나는 요리도 청소도 잘 못했으니 지적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 내가 고치려 애를 썼다.


남편의 외도가 '경찰이 출동하는 큰 동네 이벤트'로 나에게 알려진 이후로는 모든 게 달라졌다. 남편의 말이 모두 가식으로 들리니 나는 내 주장을 폈고 내 기분까지 전달했다. 가령, 애들이 어질러 놓은 거실을 저녁이 되도록 못 치우면, 전남편은 어김없이 잔소리를 했다. 집이 이렇게 어지러우면 휴식이 안 되니 4시부터 청소를 하고 저녁 식사 준바를 시작해서,  6시 퇴근 이전에 식사와 청소를 세팅하라는 것이었다.


외도 이전에는 그 말에 뭔가 억울했지만, 대단한 '돈 버는 가장'이니 그 말에 반박도 못하고 사과를 했다.  외도 후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 말을 했고, 마치 내가 할 일을 제 때 못 한 하녀 대 하듯이 하는 말투가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감히 내뱉기 시작했다. 이러니 전남편과의 사이는 외도 자체가 문제였다기 보다는 나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로 전남편의 심기를 건드려 일어나는 불화였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외도에 충격을 받았고 나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더 큰 염려는 그 일로 당신 아들이 기가 죽어 살까 봐 염려를 했다. 언제나 나에게 당부하는 말은 "여자가  하고 싶은 말을 어째 다 하고 사냐. 화나는 게 있어도 덜 지껄이고 살아라."였다. 아들의 외도는 착한 아들을 꼬신 그 여우 같은 여자 때문이라고 늘 나에게 일깨워 주려 애를 썼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여자에게 순진한 아들이 당할 재간이 있었겠냐며.


전남편이 운전을 해서 어딜 가던 길에 접촉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내가 옆에서 봐도 전남편이 급히 끼어 들려다가 뒤에 오는 차와 부딪힐 뻔한 것이었다. 바로 뒤차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욕을 했다. 전남편은 길 한 복판에 차를 세우고 같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얼른 내려서 상대편 운전자에게 사과를 했다.


뒤쪽에서 차들이 빵빵거리고, 어떤 차는 욕을 하며 차선을 바꾸는 모습이 보여 너무 부끄러웠다. 전남편의 과실이니 빨리 사과를 하고 보내야 큰 싸움이 안 날 것 같았다. 상대편 운전자에게 사과를 하고, 사고가 안 났으니 맘 풀고 얼른 가시라 해서 마무리를 지었다.


더 큰 싸움은 집에 와서 벌어졌다. 전남편은 나를 보고 남편 기를 죽이는 사람이라며 난리가 났다. 그 상황에 어떻게 상대편 남자 편을 들며 사과를 하냐는 것이었다. 가족이라는 건 무조건 믿어주고 한 편이 되어야지, 남편이 공격을 받는 걸 보면서도 편을 안 들어주는 건 가족으로 신뢰를 깨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전남편이 급히 끼어드는 걸 분명히 봤고, 사고가 안 났으니 상황 수습에 뭐가 더 빠를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서 얼른 사과했다고 이해를 시켰다. 하지만 전남편의 논리는, 자신의 과실이 있든 없든 그건 둘째 문제라는 것이다. 무조건 편을 들어 상대와 싸워 줘야 된다는 것이다.


사실, 외도 전이었다면 나는 뭔가 찝찝하면서도 그 말이 옳은가 싶어 사과를 했을 것이다. 나는 전남편이 '신뢰', '가족' 이런 단어를 꺼내며 나를 훈계하는 게 역겨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전남편 말에 살짝 설득이 되었다.그 때까지만 해도 솔찮이 유교걸이었던 지라, 내가 좀  냉정한가 싶기도 했다. 가족이면 품어 줘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이 일로 나는 두고두고 전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남편 기죽이는 여자'로 비난을 당했다. 밥그릇에 누룽지가 좀 섞여도, 남편 국을 먼저 식탁에 놔주야지, 아이들을 먼저 주면 , 남편 기를 죽인다고 시어머니는 얘기를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를 기죽이는 여자애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일 학년은 직접 투표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서 이름 쓰는 걸 배우던 시절이니 담임 선생님이 지명을 했다. 나는 집에서 부르던 이름과 호적 이름이 다르다는 걸 입학식 날 알게 되었고 내 이름이 '다녕'이란 걸 처음 들었다. 내 이름조차 못 쓰긴 했어도 똘똘해 보였는지 선생님이 나를 반장으로 지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알게 되었다. 여학생이 반장이 된 건 우리 초등학교 40년 역사상 내가 처음이었다는 걸. 남학생 학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오셔서 담임 선생님께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남학생 엄마라 하지만 아들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항의를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문이긴 하다. 엄마들의 논리는, 여학생을 반장으로 하면 남자애들 기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연필을 손수 깎아주시던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애를 반장으로 선정하셨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엄마들의 항의에도 선생님은 나에게 한 학기 동안 남자애들 기를 죽이는 반장 노릇을 하게 했다.


남학생이 반장 후보에 나오고 여학생은 아예 부반장 후보로 밖에 나오지 못하던 시절을 살았으니 참 예전 일이긴 하다. 그렇게 억지로 기를 살려 자란 아들들이 남편이 되니, 옆에서 누가 얼러줘야 기가 사는가 보다. 혼자 스스로 기를 펴지는 못하고 희생해서 죽어주는 시늉을 해줘야 우쭐해지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전남편과 시어머니의 불안감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는 자기가 살리는 것이다. 기 살리는 걸 옆에서 강요하고 설득으로 되냐는 말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고, 만회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내가 알아서 기를 살려 줬을 텐데 말이다.


이혼 후 전남편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해도 믿어 줄 엄마와 살아서 인지 기가 많이 살아서 아이들에게 아빠 노릇을 잘해 주었다. 부지런함이나 일찍 자고 일어나는 습관 같은 것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전남편이 되고서야 비로소 기를 살려 주는 칭찬을 많이 한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전남편으로 최고야.'라고 자주 말한다.


친구들에게도 전남편 자랑을 많이 한다. 경제적인 것을 뺏길까 무서워 재혼도 안 했고, 아이들에게 헌신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고의 전남편이라 할 수 있다. 친구들은 자기네도 어디 그런 전남편 없나 할 지경이다.



나는 내 맛대로 새콤하게, 매콤하게, 달콤하게 기죽지 않고 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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