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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Nov 22. 2019

시어머니께 아들을 돌려드립니다.

어머님, 전 됐어요. 부디 이뿐 사랑 오래 하셔요.

나는 늘 아이들의 부족한 점이 너무 잘 보였다. 딸아이의 소심한 점이나, 아들의  어수선함이 너무나 잘 보여 아이들이 밖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대며 억울한 심정을 얘기하면 대부분 아이들 편 보다는 상대편을 들어줬다. 나의 엄마답지 않은 객관적인 판단력을, 내가 모성애가 없어서라고 전남편은 핀잔을 주었다.


전남편의 어머니, 즉 나의 전 시어머니는 아들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나이대에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 전 시어머니의  장남 즉, 전남편 사랑은, 작은 아들이나 딸에 대한 차별이 티가 나도록 이상했다.


그 지나친 사랑은 판단력도 흐리게 했다. 전남편의 외도를 알았을 때 나에게 미안해했다. 아주 잠깐 동안. 미안함을 오래 가지기엔 자존심이 상하셨겠지.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애를 낳아 온 것 도 아닌데 뭘 그리 야단을 떠냐고 했다.


아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당신 아들이 화가 났다 싶으면 나를 보고 입을 닫으라고 했다. 한 마디 더 하면 큰 싸움이 날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말을 해야겠냐는 논리였다. 여기까지도 연세를 생각하면 이해를 것도 없었다. 정말 화가 나는 일은 내가 캐나다로 가면서 할머니와 전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애들 할머니는 전남편과 짝짜꿍이 되어 애들에게 내 흉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입장에선 내가 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애들에게 '니 엄마는 독해 빠져서 니들을 버리고 갔어'라는 말을 하는 건 아이들에게 상처라는 걸 왜 생각을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설령 진짜 애들을 버리고 갔다 해도, 애들이 상처 받을까 싶어 집 나간 엄마를 위한 핑계를 만들어 주는 게 부모의 심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이 아빠를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아이들에게 아빠의 외도를 알려 주지 않았다. 참다 참다 아이들이 상당히 커서 알려 주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이혼을 했다 보니 이혼 당시의 기억은 없고, 엄마가 캐나다를 가면서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는 것부터 기억을 했다.


아이들 보기에, 엄마는 자아실현을 위해 아이들을 버린 사람으로 보이고, 아빠는 아이들에게 희생하는 가엾은 아빠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를 가장 억울하게 하는 대목이, 내가 아이들을 버렸다고 끊임없이 세뇌시킨 부분이다. 캐나다를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재결합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고, 캐나다를 다녀온 후부터는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서인 듯했다.


캐나다 1년간의 연수는 내 개인적으로는 많은 변화와 성장을 주었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산 좋고 물 좋고 와이파이까지 잘 터지는 선택은 없었다. 역시나 파도를 넘으면 새로운 파도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파도 끝에는 선물이 있으니 파도는 넘으면 된다는 각오로 쉬지 않고 싸웠다.


 캐나다 연수를 마치고는 친정 동네로 이사를 했다. 당분간 친정에 얹혀 있으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아파트를 구해 아이들을 데려올 준비를 했다. 아이들과 주말을 같이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주는 패턴을 2년 정도 했다. 기간 동안 전남편과 무수히 싸웠다.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한 싸움이었다.


시어머니에게 그 이뿐 아들을 반품했지만, 내 이들까지 줄 수는 없었다. 할머니와 애 아빠는 아들은 절대 뺏길 수 없는 강경한 태도였으나 딸은 살짝 남의 식구로 대했다. 그건 나를 더 열 받게 하는 대목이었다.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건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독이었다.


딸애가 자기 의견을 또박또박 말하면 전남편은 "넌 어떻게 말하는 게 엄마랑 똑같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할머니는 집에 접시 하나가 안 보이자 딸에게 "니가 엄마  가져다줬지?" 하며 다그쳤다고 한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아빠의 외도를 말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정확한 이혼 사유를 몰랐다. 단지 엄마랑 아빠랑 많이 안 맞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들을 아빠 집에 내려 주고 잘 들어갔나 싶어 전화를 했다. 아들이 꺽꺽 거리며 "엄마, 흑 흑, 내가 이따 전화할게. 지금 아빠한테 혼나는 중이야." 사연을 알고 보니, 아빠가 아들에게 뭔가 나무라는 말을 했는데 아들이 말대꾸를 했단다. "그렇게 잘난 아빠는 왜 엄마를 놔두고 바람을 피웠어? 그런 아빠가 나를 혼낼 자격이 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남편은 아들의 엉덩이를 야구방망이로  때렸다고 한다. 그 대목에서 전 남편은 그때까지 내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유책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고, 나에게 고마워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과 자기 성찰이 되는 인간이라면 내가 이혼까지 하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애들 아빠가 유난히 아이들에게 헌신을 하는 성향도 이혼 이후에 생긴 경쟁심이라고 본다. 엄마에게 아이들을 뺏길까 싶어, 아이들에게 엄마 흉을 보고, 아이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받아 주었다. 자기를 변명하고 방어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또 아이들 아빠이니 싸움과 후퇴를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아이들에게 자기의 잘못이 컸다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다고 들었다. 전남편이, 엄마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아빠의 진가가 나왔을 텐데, 엄마는 너무 일찍 포기를 했어,라고 말했단다. 나는 외도 후 3년 넘는 시간적 기회를 주었고, 충분한 시간이라고 본다. 지금은 그 진가를 몰라서 다행인 심정이다. 다만 전남편이 상속받은 땅으로 도로가 나서 땅값이 엄청 올랐다는 소식에, 살짝 몇 초간 참을 걸 그랬나, 흔들리긴 했다. 그 자산이 아이들에게 갈 거니까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이래서 전남편을 잘 골라야 되나 보다.


나는 내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애들 아빠와 할머니에게 발끈하는 지를 의심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백 번을 생각해도,  아이들의 교육을 생각하면, 가부장적 아들 선호와, 엄마에 대한 반복적인 비난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도 나중에 며느리에게 아들을 반품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분노하는 부분이라, 글에 날이 서있고, 웃음기라곤 없을지 모르겠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의 젊은 엄마들에게 당부를 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겪은 엄마로, 며느리로서의 부당함이 있다면, 나 하나 참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에게는 다르게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다. 그것이 부당한 차별의 대를 끊는 것이고, 내 아들 딸들은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 믿는다.




하늘은 하늘색, 수박은 수박색, 너는 너의 색으로 물들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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