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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17. 2019

페미니즘 책 읽더니 이혼했네, 했어

너 그런 책 자꾸 읽다가 연애도 못 한다.

전남편이 나에게 해 준 맘에 드는 칭찬은, 내가 책 읽는 엄마라 좋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칭찬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초, 한창 인기 있었던 공지영 작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한바탕 분란이 있었다. 책 내용이 지금 생각하면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결혼 전, 자유와 가능성을 경험했고, 육아로 인해 일을 그만둔 후, 과거의 가능성 경험은 여자를 더 아프게 한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2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일하고 싶은 여자의 욕구는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자아실현 욕구로 취급된다.  일하는 여자를, 가정형편이 어려워 맞벌이를 안 하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의 불쌍한 여자로 취급하기도 한다.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감사히 여기라 설득한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이 있는데도 일을 하고 싶은 맘은 허영심 내지는 이기심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전남편도 그런 생각이었으니 그 책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에 공감하는 나를 비난했다. 하지만 내가 더 화가 난 것은 책을 꼼꼼히 읽지 않고 목차와 양쪽 날개의 몇 문장만 읽고 마치 읽은 듯이 비판하는 태도에 더 화가 났었다.


배금자 변호사가 쓴 <이의 있습니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나는 만삭이어서 밖에 잘 못 나갔었다. 전남편에게 그 책을 좀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퇴근해서 온 전남편은, 부탁한 배금자 변호사의 책은 훑어보니 맘에 들지 않아 다른 책을 사 왔다며 책 한 권을 의기양양하게 주었다. 제목이 <여자에게 주는 99가지 충고>라는, 꼭 자기 같은 책을 어디서 잘도 찾아 사 왔다.  기분이 확 상해서 시큰둥하게 책을 던져 놓고 저녁을 차렸다. 저녁을 먹고 전남편은 빨리 책을 읽어 보라고 성화를 부리다가, 내가 안 읽으니 자기가 읽어 준다며 나를 앉혔다.


읽어 주는 걸 들어 보니 기가 막혔으나 내색도 못하고 끝까지 듣느라 애를 먹었다. 아흔아홉 가지 충고 전부다 남편을 직장 상사인 냥 기분을 살피며, 맘 상하지 않게 섬기고, 시부모에게 입안의 혀처럼 하라는 내용이었다. 아흔아홉 개 충고를 전남편은 무릎까지 치며 끝까지 다 읽어 줬다.


나중에 배금자 변호사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전남편이 아주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읽지 말라면 읽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이 읽었으니 기분이 나빴던 게다.

 

당시 페미니즘 관련된 책을 읽을 때마다, 전 남편뿐만 아니라 동네 아줌마나 주변의 친척들도 염려를 했다. 페미니즘은 자유연애를 빙자한 문란한 연애를 권장하고, 여자도 담배를 피워야 여권이 신장된다고 믿는 잡설쯤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따박따박 따지는 걸 좋아하는, 아주 피곤한 여자이며 결국 그런 여자는 팔자가 세서 이혼을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김신명숙 작가의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라는 책을 읽으니 전남편은 화를 제대로 냈다. 대체 얼마나 나빠져서 무슨 성공을 하고 싶길래 이런 책을 읽냐고 했다. 오숙희 여성학자의 책은 내 이혼에 결정적인 대안을 제시해 준 책이었다. 그 책은 숨겨 놓고 읽어야 했다.


여성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낸 계간지 <이프>를 구독했었는데, 읽다가 둔 책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나중에 온 집안을 뒤져 찾았는데, 전남편이 매트리스 밑에 숨겨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도 페미니즘 책들은 전남편에게 불법 도서 취급을 받았고, 나는 또 그걸 기어이 읽고야 말았다. 핵무기를 만드는 비법이 적힌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도 위험해 보였나 보다.


전남편의 염려가 맞았는지, 억압을 했기에 더 읽고 싶었는지 순서는 알 수 없다. 그 책들은 확실히 내 이혼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 책들로 인해 내가 뭔지 모르게 억울했던 것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루에 뒤죽박죽 들어 있는, 감자, 콩, 쌀을 종류별로 가지런히 구분해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족이나 사회에서 기대하는 삶과 내가 살고 싶은 삶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두려워할 때, 어느 쪽이 나를 비굴하지 않게 할지 방향을 알려 주었다. 내 혼자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내 딸과 아들은 좀 더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힘도 페미니즘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남편이 주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을 수도 있다. 말없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고 살아왔던 친청 엄마의 삶을 배우고, 다시 딸에게 참는 걸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 억울해서,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무녀처럼 시름시름 아팠을 것 같다.


에덴동산에서  절대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먹은 이브는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졌다고 했다. 전남편이 그렇게도 숨기고, 말리던 페미니즘 책은 나에게 선악과처럼 사리 분별을 게 해 준 것이다. 그때 그렇게 숨길 것이 아니라, 와이프가 읽는 책이니 관심을 가지고 읽었으면 나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금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못 견디는지 잘 안다.  재밌겠다 싶은 건 얼른 도전하고, 힘들겠다 싶은 건 피하는 지혜가 있다. 내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도, 비굴하지도 않게 살 수 있는 것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앞서서 돌을 맞아가며 쓴 책들 덕분이다.


나이든 사람은 눈이 밝아져 봤자 잔소리만 는다. 부디 젊은 친구들이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여,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아들 딸들의 삶도 억울함 없이 밝아지길 바라는 맘이다.


가을에 피는 구절초처럼  소박하지만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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