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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18. 2019

이혼해보니 그리 나쁘지 않아

나를 성장시킨 이혼

판사나 검사도 개인적 경험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 뺑소니를 당한 가족을 가졌다면, 유사한 사건에 더 공감하며 엄격해지고, 다단계 피해를 경험했다면 같은 범죄에 더 분노한다는 것이다. 공정해야 할 법조인도 그럴진대, 평범한 사람들이야 개인적 경험이 세상을 보는 눈의 전부일 수도 있다.


나 또한 이혼을 한 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걸 깨달으면서 본의 아니게 겸손해지고 성숙해졌다. 전에 보이지 않던 소외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공격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작은 것에도 발끈하는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를 방어하려는 보호책이라는 것도 보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린이 집을 다닐 때 이혼을 했고, 이혼 후에 어린이집을 옮기게 되었다. 할머니 집 근처로 옮기려다 보니 빈자리가 있는 곳은 큰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 밖에 없었다. 그곳은 한국 전쟁 직후, 한 목사님이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해 주면서 시작된 보육원이 있었다. 큰 교회와 보육원이 있는 시설에 어린이집도 있었고, 그 어린집에는 보육원 아이들이 한 반에 서너 명씩 섞여 있었다.


그 어린이 집은 어떤 부모들은 기피하기도 다. 보육원 아이들과 같은 반에 있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 보육원 아이들은 근처 초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초등학교에서도 학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기피다고 들었다. 나는 그 사실들이 내가 이혼을 하고 니 보였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린이집에서는 어린이날에 큰 합동 생일잔치를 한다. 보육원 아이들 생일잔치와 체육대회를 지역 내빈, 여러 예술단체들의 협찬을 받아 성대하게 했다. 김밥과 간식을 준비해서 행사장으로 갔다. 엄마와 아이들이 팀으로 게임도 하고 춤도 추는 시간이 있었는데, 7살짜리 아주 눈이 굵은 뽀얀 남자애가 내 짝이 되어 포크댄스를 추게 되었다.


갑자기 그 아이는 나를 보며 "엄마 왜 이제 왔어?" 하며 나에게 안기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엄마인척을 해야 할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눈물을 닦았다. 그 아이 이름은 정민(가명)이었고 나에게 얘기하는 걸 보니, 엄마는 곧 데리러 온다 하며 보육원에 정민이를 맡긴 것 같았다.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엄마의 얼굴이 가물가물 해져 나와 헷갈린듯했다.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동생이 생겼는지, 아저씨와 동생 안부를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내가 우물 쭈물하며 눈물을 연신 닦으니 멀리서 보던 정민이 담당 사회복지사가 달려왔다.


복지사도 나에게 정민이 엄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정민이가 착각할 만하게 닮았다고 했다. 복지사는 정민이에게, 나는 그 아이 엄마가 아니라고 이해를 시키며 아이를 달래 주었다. 나는 정민이가 너무 안쓰러워 그 날 하루 우리 애들과 함께  종일 뛰어놀았다. 다섯 살 아들은 옆에서 눈치 없이 '우리 엄마야, 형아 왜 자꾸 우리 엄마 따라다녀?" 해서 두 아이를 달래느라 땀을 뺐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우리 애들과 정민이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애들을 데리러 주말에 학교 앞으로 가면 정민이를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문구점에서 간식거리나 문구류를 사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나에게 반갑게 달려와서는 돈을 달라고 했다. 문구점에서 뽑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몇 번 동전을 주기도 했는데, 나중엔 갖고 싶다는 물건이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나는 담당 복지사와 통화를 했다. 복지사는 정민이의 행동을 걱정하며 절대 돈을 주지 말고 물건은 부담 없는 선에서 사 줘도 된다고 했다. 그 당시에 3학년이었는데, 돈이나 물건을 훔치는 세가 생겨서 고민을 하던 중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운동회 때마다 정민이를 만났고, 담당 복지사에게서  정민이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고학년이 된 후로는 눈도 잘 못 마주치는 불안한 눈빛이 역력했지만 오랫동안 봐 와서인지 볼 때마다 머쓱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정민이는 잊고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들에게 정민이 근황을 물어봤다. 건너 건너 수소문을 해 보니 보육원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나갔고, 외삼촌이 하는 일을 도와 같이 일을 한다고 했다. 다행히 가족을 다시 만난 것 같아 안심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어린이 집 행사에 꽤나 열심히 참여를 했다. 심지어 보육원의 실질적 주인인 목사님이 주최하는 큰 예배도 참석을 했다. 예배를 마치고 보육원의 아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이라 생각을 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안쓰럽고, 그 가운데 기특하게 자라는 아이들이 이뻤다.

 

약간의 장애가 있어 버려지는 아이, 설날이면 한 번씩 가족을 만나고 다시 보육원으로 오는 아이, 내년 봄이면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기다리며 몇 번의 봄을 넘긴 아이. 각각의 사연을 듣는 내가 놀라는 줄도 모르고 아이들은 재잘거렸다.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 어린이집을 싫어하고, 보육원 아이들과 내 아이가 짝이라도 되면 선생님께 항의 전화를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아찔한지 모르겠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 될 뻔한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혼을 하다 보니 이혼가정 아이들의 아픔이 남일 같지 않고, 우울해 보이거나 비관적인 엄마들을 보면 안타까워진다. 모임에서 대화에 소외되는 사람이 보이면 항상 말을 먼저 걸고, 어디 소심하게 쭈뼜대는 사람이 없나를 살피게 된다.


내가 받은 가엾은 눈빛에서, 따뜻한 진심과 우월감 섞인 동정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같이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인지, 뭔가 자존심이 확 상해서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드는지 몸이 알아서 반응을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맘을 상하게 하는 동정을 주지 않는지 항상 경계한다.


이혼을 통한 아픔을 겪은 후에야, 비슷한 아픔을 알아채고 감싸주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다른 종류의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는 마음보를 가지려 애를 쓴다. 이혼은 나를 철들게 했고, 안 보이던 것을 보게도 해 주었다.



진흙 속에서도 꽃은 기어이 꽃으로 피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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