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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19. 2019

인생이 온통 삼재 같을 때

엄마는 뇌경색으로 누워계시고 딸은 중2병으로 몸져 눕고,

이혼 후 친정 옆으로 이사를 한 건, 일을 하면 아이들을 맡길 수밖에 없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려오기 전에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엄마의 환자 기간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반신이 마비가 되었고 사람도 잘 못 알아보는 아기가 되었다. 뇌경색은 뇌 속에 있는 혈관에 쓰나미가 지나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와 같다고 했다.


엄마는 누군가 한 사람은 꼭 붙어있어야 하는 환자였기에, 아버지와 간병인 아주머니, 나, 여동생이 번갈아 가며 당번을 했다. 영어를 가르치며 늦게까지 일을 했고, 주말엔 애들 엄마를 간호하는,  정말 그 7년은 내게 기혹한 시절이었다. 엄마는  뇌경색으로 누워계시고  딸아이는 중2병으로 몸져 누운 것이다.


 이제 다 지났으니 딸의  중2병 증세를 말하자면 이랬다. 교복을 숨도 못 쉴 정도로 타이트하게 줄여 입고, 가방엔 책은 하나도 없고 화장품 파우치만 들어있었다. 학원은 가자 마자 가방만 두고 살짝 빠져나가서 놀다가 마칠 때 되면 다시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학교는 10시가 다 되어 가서 바로 엎드려 잤다고 한다. 그 시절이 내겐 이혼하던 과정보다 힘들었다.


이혼 소송을 할 땐,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희망이 실낱 같이 있었다. 딸아이의 사춘기 시절과 엄마의 병간호가 겹친 그 시기는 내게 '전생에 죄가 많구나'를 읊조리며 살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딸은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갔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예전에 동시를 쓰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던 그 예쁜 딸로 돌아온 것이다. 딸은 자기도 중학교 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3 까지의 담임 선생님들 모두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자기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었다고.


친정 엄마는 딸아이 중3 때 돌아가셨다. 내가 이혼 소송을 진행하던 중, 친정을 갔을 때, 엄마는 너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나가지도 못한다고 하셨었다. 이혼 후 친정 집으로 들어가 잠깐 살았다. 그때 나는 설움을 좀 받았다. 엄마에게 내가, "엄마, 지금 엄마가 그렇게 말해도 엄마 아프면 결국 내가 간호하지 누가 하겠어?" 했더니 "아플 때 간호 안 해줘도 되니 너나 잘 살아." 했던 엄마가 한 달 후에 쓰러지셨다.


 7년을 누워 계시는 동안, 나는 내가 이혼을 하고 마음껏 엄마 옆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느꼈다. 이혼을 안 했더라면 남편, 시어머니 눈치에 맘껏 못 드나들었을 것이다. 엄마가 누워계시는 동안 서서히 엄마 없이 사는 준비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 오니 너무 할 일이 없어 깜짝깜짝 놀랬다. 하루에 이불 빨래를 몇 번씩 하기도 했고, 엄마에게 미음이라도 먹이려면 온갖 힘을 다 쏟아야 반공기 정도 삼킬 수 있었다. 그것도 자칫 잘못하면 사래가 들려 억지로 넘긴 미음 토할 수도 있었다. 엄마 운동시키고, 목욕시키고 나면 빨래가 수북 했다. 돌아서서 미음먹이고 나면 설거지거리가 수북졌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엄마가 안 계시니 심심할 정도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때야 깨달았다. 환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엄마가 계실 때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감히 못하다가, 막상 돌아가시니 몸이  편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어 죄책감까지 생겼다.


딸애가 고등학교를 간 후 나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와 나는 각각 집의 절반을 사용하며 독거노인이 되었다. 그즈음 나는 바느질 공방을 시작했다. 낮에는 바느질을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손님 중에 점쟁이가 몇 명 있었다. 점쟁이 아주머니가 나보고 그랬다. 지난 시간 어떻게 견뎠냐며, 들삼재 3년에  날삼재 3년을 겪었고, 이제 서서히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때 삼재라는 말도 처음 들어봤다. 검색을 해보니 네이버도 내가 힘든 시기를 겪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만 몰랐던 것이다. 네이버에 삼재인 띠를 검색하니 내 얘기가 거기 다 나와 있었다.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이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사춘기가 호락호락할 수가 있을까? 나이가 40이 넘어가면 부모가 70이 되어 갈 텐데 맨날 건강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냥 세상에 태어난 게 삼재이고, 이 삼재는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는 터널 같은 시절을 한 번은 겪게 마련인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면 인생이 온통 삼재라 여기면 될 것 같다. 책임져야 할 게 많고,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도 많은 것이다.


삼재는 어떻게 겪어내느냐가 문제지, 이게 언제 끝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오는 파도를 어떻게 감당해 내는가가 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겪는 일이 전생에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내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서도 아닌 것이다. 살다 보면 넘어지고 다치는 게 삶의 과정인 것이다.


이 파도를 어떻게 넘어갈지 방법을 고민하며 이왕 파도를 타는데 그 속에 숨어있는 스릴도 느끼면 된다. 점쟁이가 주는 부적보다 더 신통한  부적은 내 마음이다. 보약도 힘이 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먹어야 파도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 엄마의 뇌 상태를 설명해준 의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뇌에 쓰나미가 지나가도 내 몸이 건강하면 흐트러진 혈관들이 용케 살아나서 다시 제기능을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 기초 체력이 약하면 작은 쓰나미가 계속 진행이 되어 몸이 더 악화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맘을 단단히 먹고 실핏줄을 다시 살리는 심정으로 살아 내다 보면 어느새 터널을 벗어나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파도를 타는 모두에게 이 부적을 드립니다.

https://brunch.co.kr/@red7h2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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