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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20. 2019

애교가 없어 바람을 폈다고?

전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를 힘들게 한 두 가지가 있었다. 믿고 사랑하며 살 사람이 없다는 절망감과 남편의 외도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전남편의 외도를 내가 먼저 알았다면 아마 나는 이혼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외도를 상대 여자가 조용히 알려 줬다면 아마 나는 그 말을 믿지도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온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과 상대편 가족의 싸움을 아침드라마처럼 구경시켰으니, 순식간에 세상 불쌍한 여자가 된 것이다. 전남편의 외도를, 조금 전까지 아이들을 함께 놀게 하던 아래 위층 엄마들과 동시에 알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다음날, 온 동네 엄마들이 쑤군거림이 귀에 쟁쟁했고, 궁금해서 못 견딘 몇몇 엄마들은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듯이 넋이 나갔고,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 엄마들의 일상이 너무나 부러웠다. 지금도 위층 아줌마가 해준 명랑한 말이 기억난다. "그 여자 보니 새댁보다 안 이쁘던데 오늘 저녁에 남편 퇴근하면 세게 잡아. 그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나는 그렇게, 두유를 사 오랬더니 우유를 사 온 사람 혼내듯, 소리 한 번 빽 지르고 끝낼 일인 양 말하는 게 참 신기했었다. 진심으로 그럴 수 있는 사안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살던 지역을 떠나 이사를 한 후, 전남편의 외도를 가족만 아는 상태가 되어서야 배신감이 크게 다가왔다. 그때부터는 그녀와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과 전남편친구였고, 불과 몇 주 전에 두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었다.


같이 밥을 먹던 식당에서, 나는 큰애에게 밥을 먹이느라 분주했고, 둘째는 안고 있었다. 전남편은 계속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 주었었다. 옆에 있던 남편의 상간녀와 그녀의 남편은 전남편의 자상함을 칭찬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침 드라마도 이런 아침 드라마가 없는 장면이었다.


그 날의 식사 장면을 몇 번이나 되감기를 하며 남편의 상간녀에게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를 곱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둘째를 낳고부터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잤고 전남편은 혼자 잤다. 나는 아이가 자면 집안일을 하고, 아이가 깨면 아이들을 챙겨 먹이는 생활을 하면서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생활을 했었다.


전남편이 그녀의 무엇에 끌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그녀에게 부러운 점은 그녀가 직업이 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피아노 학원을 하던 그녀가 두 아이들을 친정부모님께 맡긴다는 환경이 부러웠고 아이 엄마로만 살지 않고 여자로 살 수도 있었던 그녀에게 질투가 났다.


이혼을 한 후, 아이들에게 전남편이 자기의 외도를 인정하면서 한 말이 어이가 없었다. "엄마가 애교도 없고 무뚝뚝해서 아빠가 좀 한 눈을 팔았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먼저 내가 애교가 없고 무뚝뚝하다는 인정할 수 없어서 화가 났고, 사실이라 해도 애교가 뭐길래 외도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주워다 붙일 생각을 했는지가 놀라웠다. 더 화가 나는 건, 외도한 여자가 여우같이 애교가 많고 싹싹한 여자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보다 훨씬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애교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건조한 사람이었다. 아귀가  하나도 안 맞고 성의도 없는 변명이었다.


전남편의 외도는 그냥 심심해서였다. 약간의 설레는 재미를 위해서 딴 여자를 만난 거였다. 그 당시 그녀와 나를 비교하며 나의 무엇이 부족했을까를 반성했던 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의 상황이 거짓말을 하고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전남편이 슬쩍 찔러봤는데 훅 넘어오니 일이 진행된 것이라고 본다.


혹시 남편의 외도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 글을 쓴다. 그냥 배우자나 상대편이 나쁜 사람인 거지 내가 부족해서는 아니라 말해주고 싶다. 전남편이 이혼하기 전에 한 말이 기억난다.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나가 그녀를 만나면서 든 생각이 '내 마누라도 어디 가서 이러면 어쩌지?' 했단다. 대단한 사랑도 아니고 뭣도 아닌, 상대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 있는 요상한 만남이 외도인 것이다.


그 당시 전업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시절이니 그녀의 경제적 능력이 가장 부러웠었다. 전남편도 그녀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성에 끌렸고 집에 있는 와이프는 만만해서 무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후로 내가 경제적 독립을 위해 몸부림칠 때 전남편은 온 힘으로 말렸다. 마치 나무에 올라가려는 나를 밑에서 당기고, 위에서 나무를 흔들어 떨구어 내듯이 핍박을 했으니 말이다.


전남편이, 애기들 때문에 잠을 설치면 출근하는 사람 힘들까 싶어 각방을 쓴 게 문제였을까? 내가 나긋나긋 연한 배 같지 못해서 일까? 분위기 맞는 침대커버와 커튼으로 로맨틱하게 꾸미지 못해서일까? 심지어, 이사를 잘 못해서일까? 온갖 반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 성찰이 무색하게 원인은 단순했다.


자주 만나고, 거리상 가까운 '접근성'이 좋았다는 점과 서로의 상황이 각자의 배우자에게 거짓말을 하기 좋았다는 '상황'인 것이다. 필요충분조건이 맞아 발생한 일이고, 나는 하필 거기 있어서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이다. 배우자의 외도가 자식도 체면도 돈도 필요치 않은 정도의 운명적 사랑이라면 그 영역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정을 지키고 싶은데 잠깐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싶어 그야말로 '바람'을 피웠다면 시간을 두고 대화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이 사건을 완전히 덮고, 다시는 거론하지 않을 맘이 되어야 한다. 작은 것 하나에도 '내가 너의 외도까지 참아 줬는데 이렇게 대해?'라는 맘이 끊임없이 올라온다면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완전히 없던 일로 묻고 새로 시작하려면 충분한 사과가 필요하다. 전남편이 자신의 외도를, 처음에는 축소시키고, 두 번째는 상대 여자를 탓하고, 나중에는 내 탓까지 했으니 도저히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의 기간을 가졌더라면 이혼은 막았을 것이다.


배우자의 외도를 알면서도 경제적 독립이 두려워 유지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건 화분에 물 한 방울 안 주고 밀폐된  다락방에 방치하는 일이다. 밖으로 나와 비, 바람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고 잘 자랄 텐데 말이다.


성찰하고 반성해야 사람은 세상 편히 사는데, 정작 옆에서 자기를  아프게 하며 사는 아내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지나친 반성은 내 안에 송곳을 숨기는 것과 같다. 나를 찌르다 찌르다 남도 찌른다. 송곳을 던져 버리려면  분노를 어떻게든지 풀어야 한다. 내 불행 감당하기 힘든데 남의눈을 의식하느라  불행을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남자 연예인이  '애교 많은 여자가 좋아요'라는 말을 하면 발작적으로 싫어한다. 애교는 강아지나 아기한테 기대하시길.



내 안은 촉촉고 달콤하니,  그대로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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