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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23. 2019

Merry 한 크리스마스가 뭐게요?

이쯤 되면 멀쩡한 부부도 이혼을 몹시 하고 싶어 질 것이라 본다. 퇴근을 하면서 오늘 저녁은 남편이 뭘 차려 놨을까를 기대하는 아내가 대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 운 좋은 여자가 나다.


현 남편이 4시 반쯤이면 퇴근을 하니 언제나 저녁 준비를 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한다. 아침에 저녁으로 요리할 고기나 생선을 냉동실에서 꺼내 놓고 출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 5시부터 저녁 준비를 슬슬 시작하는 것이다. 가끔 저녁 준비에 꾀가 나면 다섯 시 반쯤 문자가 온다.


저녁으로 치킨을 시켜 먹어도 되겠냐고. 그럼 나는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허락해 준다. 내가 하는 일은 치킨집에 주문 전화를 전화를 해 주는 것이다. 현 남편이 한국에 10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한국어 울렁증이 있어서 한국인과 얘기할 때면 당황하기 일쑤다.


이명박 정권이 멀쩡한 강바닥을 파헤치면서 세금을 낭비하고 환경을 해쳤다. 낙동강 근처에서 장어구이집을 하던 지인은 공사를 하던 기간 동안 재미를 쏠쏠하게 봤다고 했다.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지인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혜택을 본 것에는 민망해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영어 몰입 교육을 한다며 국사도 영어로 수업을 해야 한다고 허튼소리를 했었다. 그때 미국이나 영국에서 많은 원어민 교사가 한국의 공교육에 들어왔다. 당시 현 남편도 학위를  마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 보던 중이었다. 한국에서 대규모 공고가 난 걸 발견하고, 1년 정도 경험하면서 영국이나 미국에 있는 대학에 계속 이력서를 넣어 볼 계산으로 왔다고 한다.


그렇게 현 남편은 내가 살던 시골 마을로 오게 되었고, 캐나다 어학연수 후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허튼짓으로 현 남편을 만났으니 지난 정권을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전남편에게 받은 위자료로 어학연수를 갔고 덕분에 영어를 하게 되었다. 사실상 전남편과 이명박 정권이 나를 시집보내 준 셈이다.


큰아이 중1 때 만나 수능을 치고 재혼을 했다. 6년을 만나면서도 내게 재혼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현 남편은 내 고단한 싱글맘 시절의 대나무 숲 같았다. 딸아이 사춘기를 겪으며 힘들어할 때, 사이비에 빠져 개 논리로 훈계를 할 때도, 엄마가 점점 쇠약해져서 35킬로의 앙상한 몸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현 남편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어깨를 내주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을 현 남편과 함께 맞이한 지 5년째가 된다. 남편은 언제나 크리스마스 전이면 나 몰래 분주하다. 내가 없을 때 대청소와 이불빨래를 한다. 소파 뒤, 냉장고 위 같은 평소에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청소하며 명절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 쇼핑을 나 몰래 다녀오는데, 무엇을 샀는지 강력히 모르고 싶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숨겨 놓을 만한 옷장 속이나 신발장은 열어보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뜨면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선물 가방을 침대에서 겨우 눈을 뗀 내게 안겨준다. 주로 옷이나 화장품, 가끔은 목걸이나 귀걸이도 있다. 선물의 만족도는 거의 반타작이다. 하지만,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옷도 감사하게 입어준다. 내 옷과 안 어울리는 생뚱맞은 신발도 사랑으로 신어준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남편은 아침부터 저녁 요리를 시작한다. 칠면조는 둘이 먹기엔  너무 커서 닭을 굽는다. 으깬 감자와 샐러드를 준비하고 당근케이크를 굽는다. 남편이 술을 전혀 못 마시니 보통 남편은 사이다를 마시고 나는 와인을 마신다. 와인잔은 설거지를 하는 게 번거로워 머그에다 마시니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 같다며 기어이 와인잔을 꺼내 주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디너가 완성되면 "디너 이즈 레디" 하며 나를 부른다. 나는 이 순간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전남편에게 밥 먹자는 말도 하기 싫어 몇 번이나 '아빠 저녁 드시라 해' 하며 애들을 시켰던가? 반찬 타박을 하는 전남편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압력 밥솥처럼 울분을 속으로만 끓였던가?


저녁을 차려놓고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는 내 지난날을 치료하는 마데카솔이다. 한 번 들을 때마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는다. 성공한 남편이 젊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트로픽 와이프라 하는데, 내 현 남편은 젊진 않지만 내 삶의 트로피 같다.


크리스마스 때 먹고 남은 닭고기  남편은 할머니에게 배운 방식으로 치킨 캐서롤을 만든다. 그럼 며칠 더 크리스마스의 즐거운 기억을 연장시켜준다.


남편은 지금도 눈만 마주치면 얘기한다. " You are my Christmas present."라고. 자기 기도가 응답을 받은 증거가  나라고.


닭다리는 실로 얌전히 묶어준다
와인잔을 사 줬건간 여전히 물잔에 마신다.
흰머리가 수북하고 돋보기 없인 책도 못읽는 중년 부부지만 명색이 신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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