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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무엇인가?

by 다녕

갑자기 서리가 내리면 연한 잎은 콩죽이 되고 진한 잎은 남아 그 강인함을 자랑한다. 인간 관계도 그런것 같다. 내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내 주변의 인간관계가 서리를 맞은 것처럼 확실히 구분된다.


가족이라고 다 감싸 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에게 불편을 주거나, 기댈까 싶어 먼저 피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보험이나 교회 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일은 정신을 차리고, 헤쳐 나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내가 이혼을 하니 엄마는 동네 창피 한 걸 먼저 염려했었다. 아버지는 딸이 자존심 상할까 싶어 택시를 타고 다니라 하셨었다. 여동생은 자기가 속해 있던 사이비 종교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 뒤로 그 종교에서 10년 넘게 호구 노릇을 했다. 오빠는 내가 어학연수를 떠날 때 돈을 보태 주었고, 다녀와서 아파트를 살 때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었다.


신기한 건 엄마는 세상 착한 사람이었고 희생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힘들 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세상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담대하고 큰 안목이 있어 나를 놀라게 하셨다. 여동생은 똑똑한 듯한데 아직도 사이비 종교에서 못 벗어나, 자신의 성범죄자 교주를 신이라 우기며 산다. 오빠는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빵점으로, 외로운 삶을 살았다.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뭐가 진짜인지 가식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 사람들과 얽히고설켜 살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사는 것인가 보다. 나 또한 알 수 없는 사람의 일부일 것이다.


아버지는 내 이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늘 내 건강을 챙겨주셨지만, 우리 애들은 노골적으로 싫어하셨다. 큰애가 친정 집 문 앞에서 초인종도 못 눌러 오줌을 싼 적이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내가 친구 결혼식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걱정을 하며 얘기하셨다. 이혼한 애가 친구 결혼식에 가면 친구 부모님이 싫어하신다고. 가지 말라고.


이혼은 나를 철저하게 독립시켜주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재 정립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를 희생해 가며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은 없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체면이나, 돈에 손실을 감수하며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걸 배웠다. 경제적 독립과 인간관계의 독립에 더욱 기를 쓰게 된 계기였다.


어려움을 겪으며 인간관계에 재정비가 한차례 일어난다. 재미있는 건 재혼을 하면서 또 정리가 되었다.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 것이다. 재혼을 하면서 다 큰 우리 딸이 성폭행을 당할까 염려하는 말을 대 놓고 하기도 했다.


아들의 취업에 부모의 이혼과 재혼이 걸림돌이 될 거라는 얘기도 들었고, 딸의 혼사에 장애가 될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자식의 장래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내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여자가 된 것이다.


내가 혼자 살 때 자주 만나서, 시부모와 남편 흉을 보며 눈물을 찍어 내던 친구도 연락을 뚝 끊었다. 나는 내가 편해서 속 얘기를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자기보다 불쌍해서 나에게 얘기하며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늘 불쌍하던 내가 좀 행복해 보이니 불편한 사람이 된 것이다. 불쌍한 사람은 맨날 불쌍만 해야 하는데 말이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 관계는 굳이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다. 반대로, 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어떤 사람인지 점검을 해 볼 필요도 있다. 내가 힘들게 할 수도 있고, 내가 경계의 울타리를 자꾸 낮춰서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하도록 허락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애당초 울타리를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은 나의 욕심이나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혼으로 두려워할 때 여동생이 사이비 종교를 가지고 내 인생에 침범하도록 둔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우리 아이들과 내가 친정에 가면 싫은 티를 낸 것은 아버지의 경계를 내게 표현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당시에는 서러웠지만 기를 쓰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인간관계를 최소화하고 산다. 내가 사랑할 사람,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시간과 마음을 쏟는다. 정이란 말로 애매하게 걸쳐진 관계의 거품을 확 걷어내니 살기 편해졌다. 나쁘기만 한 사람도 좋기만 한 사람도 없다. 내 상황에 따라 밉기도 했다 좋기도 할 뿐이다. 미운 사람은 맘 놓고 미워하다 보면 덜 미워지기도 하니 말이다. 내 전남편처럼 말이다.


그런 고로, 최대한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아볼 작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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