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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26. 2019

경제적 자립을 위한 이혼 수업

이혼의 시작과 끝은 경제 독립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다고 했을 때, 온 가족이 말렸다. 이혼을 결정하기 전까지 한복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복집을 차릴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영어공부를 한다 하니 친정 부모님은 걱정할 만도 했다. 아버지는 위자료 받은 걸로 부동산 투자를 하라고 성화셨다. 사실, 아버지 말씀대로 부동산 투자를 했다면 지금은 거의 두배가 되었을 테니, 아버지가 옳았을 수도 있다.


위자료는 내 7년 결혼의 퇴직금이었고, 그대로 나를 위로하고, 살아갈 준비를 위해 써야만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고, 배낭여행을 떠나 볼까도 생각했었다. 내가 있는지, 하고 싶은 지를 찾고 싶었다. 결국은 혼자 떠나서 공부에 몰입하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캐나다에서 영국인 할머니가 하는 홈스테이에 머물렀다. 도착한 다음 날, 홈스테이 할머니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엄청나게 많은 샴푸의 종류에 놀랐다. 긴 머리, 짧은 머리, 금발, 흑인용 곱슬, 붉은 머리, 파마한 머리, 염색한 머리... 섬세하게 세분화되어있었다. 물론 내가 고른 건 동양인 용 제일 싼 거였다. 생각해보니 그 다양성에 맞춘 상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메이컵 베이스를 보러 갔더니, 연한 분홍색에서부터 초콜릿 색까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인이 밝은 색을 바를 순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갇혀 있던 내 고정관념들이 깨지면서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는 둥글고, 자꾸 걸어 나가야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겠구나.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자기에게 맞는 삶을 선택해 사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내 명을 축 낼 이유가 없다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 중심을 두고 공부를 했다. 내가 연습해야 할 단어와 문장의 패턴을 외우기도 중요했지만, 집중적으로 필기를 한 것은 나를 가르치는 교수법이었다. 가령 전치사나 관사를 연습한다면, 수업시간에 하는 그룹 활동들의 방법을 메모했고, 그 방법을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다.


같은 어학원을 다니면 아무래도 강사의  수업 패턴이 익숙해 져서 다양한 교수법을 경험할 수가 없었다. 당시 밴쿠버에는 크고 작은 어학원이 무수히 많았고, 학원을 등록하기 전에 맛보기 수업 한 번을 무료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등록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 달 동안 트라이얼 레슨을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를 예약해서 참여했다.


새로운 학원에서, 낯선 선생님과 처음 보는 학생들 속에서 수업을 하는 것은 긴장감과 피로감이 두 배였다. 하지만 그 한 달 동안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빈 자투리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배운 걸 연습했다. 한 달 동안 떠돌이 학생을 하면서 그들의 교수법을 열심히 적었고 그중에 제일 좋은 방법을 사용했던 학원에 등록을 해서 다녔다.  


나이가 들어서 연수를 간 나는 학원의 20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20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기 바빠 나를 끼워주지 않으니 홈스테이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홈스테이 할머니 기도모임, 교회 친구 결혼식에도 참여하면서 공부 한 걸 연습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방문교사를 했다. 내가 캐나다에서 배웠던 방식을 사용해 보고 싶어서 개인 수업뿐만 아니라 단체 수업도 시도했다. 방과 후 수업이나 도서관 특강도 기회가 되면 했다. 심지어 학교 영어 연극 대회도 팀을 꾸려서 대본을 만들고 노래 연습을 시켜서 내 보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캐나다에서 쓴 돈은 금방 만회가 되었고, 어디에 살아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술과 담력을 가지게 되었다. 전남편이 준 위자료는 그 돈의 목적대로 잘 쓰인 것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던 것도 아니고 영어를 특히 잘했던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내가 언어를 빨리 배우고 사교력도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공부를 했으니 절박함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또한, 일에 일머리를 알고 하면 수월하듯이 수업을 이끌어 가는 강사의 교수법 전체가 눈에 보였다.


영어를 가르치는 동안 나는 틈틈이 바느질을 했고 그림을 그리고, 방송 통신대 영문학과 공부도 했다. 그 모든 활동은 나에게 돈을 벌게 해 주었다. 내가 만들어서 입고 다니던 옷을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서 바느질을 했고, 우리 집의 커튼과 같은 걸 만들어 달라해서 커튼을 만들고, 얼룩진 옷을 살리기 위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서 옷에 그림을 그려 주었다.


좋아서 하던 일이, 안 하면 안 되는 경지가 되니 돈이 되었다. 취미로 바느질을 할 호사스러운 팔자가 못되어 삯바느질을 했지만 바느질과 영어는 나에게, 밥과 공과금, 기름값을 제공해 주는 필살기가 되었다. 커튼이나 식탁보에 그림을 그릴 때는 내 모습이 너무 낭만적으로 멋지게 보일 것 같아 누가 옆에서 봐 줬으면 하는 심정이다.


전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했으니 어떻게든지 전남편의 돈으로 자립을 할 계획이 모두 맞아 떨어졌다. 한복도 영어도 전남편의 돈으로 배웠으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너 없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마' 였는데 dreams come true가 된 것이다.




친구들과 학생들이  '강사임당'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림 그리는 영어강사, 강사임당.^^*

https://brunch.co.kr/@red7h2k/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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