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녕 Dec 27. 2019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아들에게 링크를 보냈다. 아무리 미운 전남편이지만 아이들이 성인인데 혼사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 글 속에 전남편은 가루가 되게 씹히고 있는데 혹시나 전남편이 보게 될까 겁이 나기도 한다.


다행히 아들은 글로 나마 아빠를 맘껏 흉을 보라고 한다. 남편으로는 빵점이었지만 아빠로는 천 점이라고 하면서. 아빠 노릇을 잘해 준 걸 아들이 알아주니 고맙고, 남편으로서의 아빠는 엄마가 힘들었겠다는 것도 인정해 주니 기특하다. 아빠의 역할을 다르게 분리해서 볼 줄 아니 참 고마운 일이다.


이혼을 한 직후에는 아이들 양육 문제로 많이도 싸웠다. 전남편의 명분은 아이들과 시간을 더 보내자는 것인데 사실은 나를 힘들게 하려는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화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악착같이 싸우고 나면 그 미움이 불처럼 타올라 소화도 잘 안되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태양을 삼킨 새>처럼, 분노가 안에서 이글거리는 느낌이었다. 김기창 화백이 그린 그림에서 태양은 '열정', '예술혼', '꿈'과 같은 고상한 상징이었을 게다. 그림을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어주다가 발견하고는, 심정 같다고 생각했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한 번 씩 전남편이 했던 말이나 행동이 생각나면 나는 내 안에서 반박을 하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내 안의 미움이 나를 삼킬 지경이어서 어떻게 뱉어버릴지 방법을 모색해 봤다. 어차피 있는 미움의 에너지이고 아무리 버리려 해도 안되는데, 그럼 이 에너지를 어떻게든지 활용해 보자 싶었다.


사랑과 긍정의 힘이 세다지만 미움의 에너지가 더 셀 수도 있다. 사랑도 몸에 병이 나게 하겠지만 미움은 심각하게 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만큼 힘이 세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운동을 하러 가기 싫을 때마다 전남편을 떠올렸다. 내가 아프면 좋아할 전남편 모습을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으면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공부할 때도, 미루거나 게을리하고 싶어 지면 전남편 모습을 떠올렸다. "당신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조용히 남편 말이나 잘 듣지 뭔 고생이야?"라고 빈정거릴 모습을 생각하면, 분노로 잠이 확 깨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난 할 수 있어, 도전해 보자', 하는 긍정의 힘보다 전남편에 대한 미움의 에너지를 사용하면, 나를 움직이게 하는 효과가 더 좋았다.


새로운 모험을 좀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전남편을 떠올렸다. 그래, 이걸 해 내면 얼마나 약 오르겠어? 하면서, 배 아파할 전남편을 상상하곤 했다. 아이들을 통해서 내 얘기가 전남편 귀에 들어갔는데, 그때마다 전남편이 실제로 약 올라했다. 그 약 오름의 최고는 나의 재혼이었다.


옆집 처녀 믿고 장가 못 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전남편이 옆 동네 사는 전처 믿고 장가를 못 간 격이었다. 그러다 내가 재혼을 한다니 약이 얼마나 올랐을까? 딸에게 나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남편은 아이들과 내가 좀 가깝다 싶으면 질투를 한다. 배신이라 하면서 어떻게 엄마랑 그렇게 친하냐고 난리를 친다.


딸이 카톡 프사에 나와 찍은 사진을 걸어 둔 적이 있었다. 딸에게로 바로 아빠의 문자가 왔다. 카톡 프사를 보기 싫으니 바꾸라고. 딸은 알겠다고 대답만 한 후 바꾸지 않았더니 득달 같이 전화가 왔다. 당장 바꾸라는 것이었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남편에 대한 미움이 희미해지고 고마운 마음만 남았다. 사실, 외도를 안 했으면 이혼도 못했을 것 같아,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해준 외도조차 고마운 맘이다. 하지만 전남편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여전하다. 자기를 참아주지 않은 나에 대한 원망은 늙지도 않는 것 같아 안쓰럽고 우습다.


의지로 감당이 안 되는 미움이 있다면 활용해 보길 바라는 맘에서 글을 쓴다. 밥을 먹다가도 체하게 만드는 미움이 있다면 그건 이미 도를 지난 친 것이다. 나를 살릴 에너지로 전환하려 몸부림을 친 방법을 추천한다. 미움으로 몸이 상하면 나만 손해이니 말이다.  


이제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 제대로 보인다. 태양을 삼킨 새는 분노가 아니라 열정과 꿈으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혹시나 유명해져도 딸이 아빠의 귀는 막아주기로 했다. 안심하고, 한 톨의 앙금도 없을 때까지 흉을 볼 작정이다. 내가 쓰는 글은 <분노를 삼킨 새>라는  강다녕 버전인 것이다.


분노의 힘이 없어지니 커피의 힘으로  각성시켜 운동을 하고 글을 쓴다.

https://brunch.co.kr/@red7h2k/5

https://brunch.co.kr/@red7h2k/3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