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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Nov 20. 2019

간 키우러 어학연수를 간 독한 애미

100밤이 지나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

산골에서 자란 내가 진짜 바다를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흑백 TV로 본 바다가 다 였으니 수학여행 전날 잠을 설쳤다. 수평선이라는 걸 처음 본다는 설렘과 바다의 파란색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에. 부산 태종대에서 난생처음 본 바다는 숨을 멎게, 헉- 이었다.


그 새파란 색과, 넓은 끝에 닿은 하늘은 6학년 여자아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면서 처음 집을 떠날 때, 나는 6학년 수학여행 전날의 설렘을 느꼈다. 이혼하기 전에 그랬다. 분명 내가 만날 새로운 바다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혼을 하고 2년쯤 되었을 때였다. 한복 바느질을 어느 정도 배웠고, 기능 대회에서 매달도 땄다. 하지만  주말이나 명절 전에는 너무나 바빠 아이들과 시간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직업이 필요했다. 한복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에 언어를 좋아했으니 영어를 공부하자 싶었다. 바로 유학원을 찾아갔고 6개월 뒤에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을 사고 캐나다에 있는 학교를 등록했다.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 작은애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이들에게 6개월 후에 떠난다고 해도, 6개월은 실감이 안 났나 보다. 별 반응이 없었다. 전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야 했으므로 맘이 좋지는 않았다. 다행히 할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했다. 물론 애들 보는 앞에서, 할머니와 애들 아빠는 내 욕을 푸짐하게 했겠지. 위자료 받아서 해외연수 가는 독한 엄마라고.


애들이 물었다. 캐나다 가는데 얼마 드냐고. 그건 분명 애들 아빠가 물어보라고 시킨 것이었다. 나는 애들에게 가장 큰 수인, 100만 원이라고 말했다. 애들은 기대했던 대로 놀라며 큰돈이라 생각해 주었다.


캐나다로 떠나는 날은 금방 다가왔다. 아이들은 일주일 전 까지도 실감을 잘 못 했다. 30 밤만 자면 엄마는 떠나. 일주일 후에 떠나. 그때까지도 실감을 못하다가, 내일 아침에 너희가 학교를 가면 엄마는 캐나다로 가. 그리고 내일부터는 할머니 집에서 살아야 돼. 엄마는 100 밤 자면 와. 그제야 아이들이 슬퍼하기 시작했다.


큰애가 학교를 가면서 몇 번이나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딸애는 학교 앞 주차된 차 뒤에 앉아서 한 참을 울다가 학교를 갔다고 한다. 아들 녀석은 그때 어린이 집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나는 이민 가방을 붙잡고 울었다.


눈물을 훔치며, 간 키우러 캐나다로 떠났다. 밴쿠버에 있는 어학원을 등록했고, 영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홈스테이에 머물렀다. 노쓰 밴쿠버의 주택가에 있는 집이었고, 어학원은 다운타운이었다. 아침마다 바다를 건너는 씨 버스(sea bus)를 20분 정도 타고 공부를 하러 다녔다.


일주일이 지나니 캐나다 지도가 눈에 딱 들어왔다. 길을 찾는 것, 버스를 타는 것, 공중전화로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들이 큰 숙제였는데 1주일 만에 다 배웠다. 난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재미에 신다. 혼자서 나를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달콤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그 말을 어학원에서 써먹어 보고, 집에서 홈스테이 할머니와 저녁을 먹으며 다시 복습을 하는 생활이었다.


그때 본 세계지도는 한국에서 보는 지도와 달라서 놀랐다. 한국에서 보는 지도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고 한국이 거의 중심에 있는 지도였다. 캐나다에서 보는 지도는  아프리카 대륙이 중심에 있고 한국은 오른쪽 구석에 있는 지도였다.  나는 내가 얼마나 세상을 보는 눈이 갇혀 있었을까를 깨달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관점이 더 많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호기심이 생겼다.


홈스테이 할머니와 캐네디언 교회를 다녔다. 다른 20대 한국인 유학생은 자기들끼리 놀기 바쁘니,어울릴 만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홈스테이 할머니 따라 마트도 가고, 교회도 가고, 심지어 교회 셀모임이나 결혼식도 따라갔다.  만나는 사람들의 말을 억지로 알아들으려 애를 쓰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고, 다시 홈스테이 할머니에게 묻고. 그렇게 공부를 했다.


그 당시 시트콤 <프렌즈>가 시즌 10 본방을 하던 시기였다. 레이첼이 헤어진 전 남자 친구, 로스의 아기를 임신하는 장면이 나왔다. 헤어진 남자 친구의 아기를 임신한 미혼모에게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홈스테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런 일이 실제로 있다면, 진짜 축하해 줄 수 있냐고. 홈스테이 할머니는 당연히 임신은 축하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 같으면 부모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고 얘기해줬다. 홈스테이 할머니는, 만약 10대의 학생이 임신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나이가 있으면 축하한다고 말했다. 무려 70대 할머니였는데 사고는 나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또다시 충격을 먹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다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아들이 내가 일러 준대로, 국가 번호 , 지역 번호를 눌러 전화를 했다. 운 좋게 아들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상당히 이국적인 'hello'를 엄마 목소리로 들은 아들은 아주 신나 했다.'엄마 헬로 또 해봐' 하면서.


간은 점점 커져 밖으로 넘치려 했다. 많은 고정관념을 부수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참 빨리 배우고, 호기심이 많았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걸 즐거워하는 씩씩한 사람이었다. 몇 살에 뭘 해야 하고, 남들이 하는 무엇에 박자를 맞출 필요가 없다는 걸 확실히 배웠다.


나는 뭔가 두려운 일을 앞두고 있을때마다 수학여행 전날 밤을 떠올린다. 내가 모르는 그 세계는 나를 겁먹게 하지만, 분명히 처음 바다를 본 날과 같은 감동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 이혼할 수 있었다.


다시, 새로운 바다를 향해 온 캐나다, 서른이 넘어 만난 이 바다는 나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난 전남편에게 받은 위자료로 어학연수를 떠난 독한 엄마이고, 간이 부은 여자였다.





LET'S GET LOST.  길을 떠나야 길을 잃어라도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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