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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Nov 09. 2019

내 비록 이혼녀라 불릴 지라도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줄 알았더니 애들이 나를 키우고 있더라.


법원에서 시집 주소로 가압류를 한다는 통지가 갔고, 아니나 다를까 난리가 났다. 평소 어리숙하고 털털해 보였던 내가 법적 조치를 취했으니 놀라움을 넘어선 배신감을 느낀듯했다. 이혼 소송 청구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일주일 혼자 여행을 마쳤다. 아이들 없이 오롯이 나만 쳐다보는 시간이 쓸쓸하고도 달콤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엄마를 반가워했고 나는 애써 별일 아닌 듯 연기를 했다. 시댁 식구들은 내가 일하는 한복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룹으로 나눠 번갈아가며. 내가 혹시라도 훌쩍이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옳타구나, 이제 넘어왔네, 하는 눈치였다. 저녁에 전남편이 집에 오면 낮에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듣고 나에게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이었다. 온 집안이 대대적인 당근책을 펴고, 전남편은 내 모성애 없음을 집중 공격했다.


이혼 소송을 진행하면서 한집에 산다는 것은 이글루 같은 얼음집에 맨발로 서있는 듯한 살벌한 일이었다. 전남편은 날짜가 다가오자 많이 불안해했다. 특히 불안해한 것은, 내가 쓴 일기를 만하에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기에 남편의 죄상이 알뜰히도 적혔으니 그게 제일 맘에 걸렸던 것이다.


특히나, 좁은 시골이조정위원으로 나오는 사람이나, 법원 직원이나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남편은 이혼보다 남의 시선이 더 무서웠다. 남의눈을 의식할 겨를 없이, 내가 죽을 판인 나는 강자였다.


이혼 조정을 위해 법원에 출석을 하 전날, 합의를 했다. 내가 요구한 7천만 원을  전세보증금을 포함해서  주고, 집은 그냥 살던 집에 살라고 했다. 단, 친권은 자기가 갖고, 양육은 내가 하기로 했다. 그만하면 순조롭게 해결 된 것이다.


합의 이혼서를 작성하여 법원으로 갔다. 법원 복도에는 여러 사람들이 노란 서류 봉투를 들고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전 남편은 그 자리를 몹시도 불편해했다. 나는 왠지 그 모습을 보는 것도 통쾌했다.


 법원 사무실은 아주 컸고, 여러 사람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담당 직원의 책상 앞에 앉아서, 직원이 물었다."아이들 키우는 거 합의 다 된 거죠? " "네."

 끝.


그 직원은 서류를 넘기면서 얼굴도 안보고 도장을 찍었다. 우리는 5분도 안되어 이혼이 된 것이다. 판사가 망치로 땅땅 치고, 서류를 보며 누가 옳네 그르네, 이런 거 하나도 없이 그냥 끝났다.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직원의  일상 업무의  하나로.


집으로 돌아와서 또 몇 달을 한 집에 살았다. 전남편도 갈 곳이 없으니 내 쫒지는 못했다. 법원에서 서류를 받은 후 나는 그 다음날 시청에 신고를 했다. 신고가 되었다는 것이 남편에게 연락이 갔나 보다. 전남편은 내가 제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냉큼 제출하냐고 했다. 이 남자 아직도 자기가 이혼을 당한 줄 모르는 것이다.


평생 처음 내 힘으로 전셋집을 구하면서, 이혼녀로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나에게 시련이 왔다. 집주인이 구두계약 후  서류를 쓰기 직전에, 내가 이혼해서 아이들과 셋이 온다고 하니 전세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나는 좌절과 투쟁의지, 모두를 느꼈다. 순순히 물러나면 "강다녕'이 아니지. 이혼녀로 살아가는데 있어 , 시련은 문밖에 널려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차차.


이사를 하기 전, 전남편에게 필요한 것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가져가고, 니가 산 것은 니가, 결혼 이후 산 것은 니가 다 가지라 했다. 내가 없을 때 다 가져가라고 했다. 안 가져갈 줄 알았더니, 진짜 텔레비전을 떼 가더라. 세탁기는 잊었는지 안 가져가다가, 나중에 나보고 돌려 달라고 들들 볶기도 했다. 심지어 자기가 빌려준 커다란 선풍기가 친정에 간 게 있었다. 엄마가 고추를 말린다고 대형 선풍기가 필요하다고 하니 빌려준 게 있었는데, 그걸 나보고 돌려 달랜다. 나는 배짱 있으면 내 친정으로 가서 달라고 하라 했다. 아~ 쪽팔림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구한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도 '쪽방'이라 부르는, 2층 주택에 딸린 뒷방이었다.  두 칸짜리 전셋집을 난생처음 손으로 계약을 한 것이다. 집을 구해서 남편 몰래 이사를 했다. 내가 필요 살림살이만 챙겨 이사를 하고, 나머지는 친정의 창고로 보냈다.


전남편은 그 날 따라 애들을 어린이 집에 직접 데리러 가 아이들과 빈집으로 간 것이다. 내가 집 정리를 하고 갈 계획이었는데, 평소 어린이집 마치는 시간보다 일찍 전남편이 데리러 간 것이다. 빈집으로 아이들과 간 전남편은 그제야 이혼을 실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으로 들간 것이다. 거기서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고 내 연락도 안 받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이혼은 이사를 한 후에 본격적인 싸움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간 전남편. 내가 전화를 하면 끊어버리는 시집 식구들. 나는 낮에는 여전히 출근을 했고 저녁에는 집 정리를 마쳤다.  애들을 데려 와야 했다. 내 비록 이혼녀로 살지언정 엄마 노릇을 안 한다고 한적은 없었다. 애들을 이용해 나를 굴복시키겠다는 그 집 식구들의 계략에 휘말릴 내가 아니다.


나는 퇴근 후,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것도 전남편 동네에 있는 파출소. 시집 식구들도 다 아는 사람들이다. 경찰차를 타고 애들을 찾으러 갔다. 시집 식구들에게 더 이상 애들을 가지고 어떤 협박도 못하게 입을 딱 막아버렸다. 경찰도 눈물 흘리며 아이들을 찾으려는 엄마의 편을 들었고,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본 모든 사람은 '엄마의 승'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려와서 새로운 형태의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여전히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가고, 마치면 아이들은 할머니 집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전남편이 애들을 '쪽방'으로 데려다주는 패턴이었다. 하루 동안 일을 조잘조잘 대는 아이들과 눈물겹게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나는 운전학원 등록부터 시작했다.


하늘을 처음으로 날아 보는 독수리처럼, 햇살을 처음으로 보는 새싹처럼, 나의 삶은 아이들과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 머리 하나 길러도 힘들고 성가신 게 얼마나 많은데 나를 키우고 아이들을 기르는 일이야 얼마나 애간장을 녹이겠어?.


혜민스님은 절대 모르는, 이혼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많이도 겪고, 보았다. 다음은 이혼한 여자라 전세를 줄 수 없었다는, 그 아저씨와 투쟁한 이야기입니다.


쪽대본으로 감질나게 내 보내며 이혼까지 오는데 2주가 걸렸습니다. 아직 제 명랑 이혼 보고서는 갈 길이 멉니다.

 

하루라도 행복하지 않으면 억울해!! donut giv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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