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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Nov 11. 2019

이혼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뭐하나 호락호락한 게 없구나

이혼을 하고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내가 살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일을 하던 한복집 근처, 주택에 딸린 2층 방을 구했다. 시골 동네라, 살던 집이나 내 직장이나, 애들 할머니 집이나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경찰과 함께 경찰차로 시댁으로 가서 애들을 데리고 온 그날 이후 좀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어린이집도 할머니 집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아이들이 어린이 집을 마치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마친 후 전남편이 나에게로 데려다줬다. 나름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세팅을 한 것이다.


이러니 전남편은 내가 아직도 자기한테 속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었다. 전남편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이혼을 했어도 제사 때는 올 거지?' 하는 문지방에 낑기소리나 하고 있었다.  나는  정서적으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독립을 했다. 그리고 희망과 재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사를 가려고 계약을 한 집주인 아저씨는  근처 고등학교 교사였다. 무려 윤리. 그런 아저씨가, 나의 상황이, 이혼을 한 후 아이들과 셋이 들어온다고 하니 집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혼을 한 사람은 소란을 피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냥 넘어 갈 수 없지.


나는 그 아저씨가 근무하는 학교 홈피에 글을 올렸다. 무려 윤리교사인  사람이 편견에 힘입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행동에 대해 그 학교 게시판에 올렸다.


며칠 후, 지역 한부모 가정을 상담하는 시민 단체 같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 윤리교사가 상담소로 연락을 해서 나를 설득을 해 보라고 한 것 같았다. 상담소장은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하며 나에게 글을 내릴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앞으로 자기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줄 테니 상담도 부담 없이 받으라고 했다.


상담 소장의 중재로 윤리교사 아저씨의 의례적인 사과를 받았고, 나는 게시판의 글을 내렸다. 상담소장은,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나의 두려운 마음이 보였는지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이후에 나는 두어 번 정도 상담을 받았다.


 아, 이렇게 방을 구하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은 이혼녀의 삶이란.


어찌어찌 근처의 다른 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고 1년 간은 나름 평화롭게 생활이 되어갔다. 그 집에서 전세 기간이 거의 끝날 즈음 집주인이 야반도주를 했다. 집이 경매로 넘어 가게 된 것이다. 전세보증금을 그대로 날리게 된 시련이 닥쳤다. 집주인이 부도가 나서 야반도주를 하고 , 집은 경매로 넘어가 노란 딱지가 붙고... BUT!! 전세 보증금을 드라마틱하게 다 받은 강다녕의 인간승리가 또 있다. 이 일은 다음에 쓰기로 하고.


윤리교사와의 분쟁은 나의 이혼 후 첫 '마상'이었고, 그리고는 금방 잊었다. 어느 날 한부모 가정을 상담하는 상담 소장의 전화가 왔다. 지역 방송국에서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을 하는데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은, 부모의 이혼으로 버려지는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라고 했다. 프로그램 끝에 나의 사례를 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혼을 했지만 아이들의 양육을 양 부모가 협조적으로 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례로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생에 첫 방송 출연을  성공적 이혼 사례 인터뷰로 하다니..


아무리 모자이크를 한다지만 내 직장과 아이들, 전남편까지 들어가는 일이라 망설여졌다. 전남편에게 얘기를 하니 갑자기 자기가 무슨 페미니스트라도 된냥 진보적인 이혼남 코스프레를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같이 해맑게 웃었다. 전남편은 본의 아니게 진보적인, 새로운 양육을 하는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다. 이혼하고도 제사에 오라는 인간이,내 덕분에.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과 집에서 노는 장면들, 퇴근 후 밥을 먹는 장면, 등을 찍어 갔다. 내가 일을 하던 한복집도 찍고 싶어 했지만 한복집 선생님이 반대를 했다. 한복집 선생님이 이혼을 할 때 내가 증인으로 서류에 사인을 해 주었고, 내가 이혼할 때 한복집 선생님이 증인으로 사인을 해 주었었다. 같은 법원 이혼 동창 인 셈이다 .


서로 이혼 서류에 증인들이라 나름 친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혼한 사례로 방송을 타는 건 싫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다. 이렇게 이혼은 이 땅에선 수치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리고 몇 주 후 어린이날 특집 방송을 을 보았다. 특집 프로그램에 나온 사례들은 보육원에 버려지는 아이들, 조손 가정 등이었다. 그 끄트머리에 성공적인 이혼 사례로 살짝 나왔다. 그 당시, 나는 아직도 전남편에 대한  분함이 많이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합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싸웠는지생각이 났다. 내가 한 이혼 준비와 싸움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준비되지 않은 이혼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전세보증금 반환 투쟁기입니다. 참 별의 별일 을 다 겪으며 어른이 되어 갔습니다.계속 응원하며 읽어 주실 거죠?



사과받아야 할 많은 인간들, 내가 이제는  용서 하마.

https://brunch.co.kr/@red7h2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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