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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Oct 30. 2019

잠깐만, 나 이혼 좀 하고 올게

남편 돈으로 독립 준비하기

  일제시대 마라톤 대회를 나갔던 손기정 선수는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그의 우승은 한국의 금메달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었다. 식민지의 설움은 내 영광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깃발을 휘날리기 위해 독립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 있는 '식민지 강다녕'은 독립을 하기가 봉오동 전투만큼이나 눈물겨웠다.


    남편의 외도를 안 후로는 같이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냉큼 이혼을 할 수도 없는 것이, 경제적 자립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밥벌이

신감이생기기까지는  참아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다 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남편의 배신이 희미해지면 살 수도 있기를 바랐다.


    5월이면 모시를 꺼내 풀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여 할머니의 여름 준비를 하고 찬바람이 불면 양단 마고자를 꺼내 외출을 하는 할머니를 보고 자란 나는 한복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대학시절, 이영희 같은 한복 디자이너를 꿈꾸며 한복을 공부했었다. 다시 한복을 배우기로 했다. 한복집 선생님께 수강료를 내고 저고리부터 배운 것이다. 어느 정도 배운 후부터는 근처에 있는 직업훈련 학원에서 양재와 생활한복을 가르치는 일도 조금씩 했다.


      한복집에 수강료를 내던 남편이 어찌나 유세를 하던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꼴깝도 그런 꼴깝이 없네. 당시, 98,9년쯤, 120만 원에 저고리 바느질을 배웠고, 6개월을 공부를 하고 그 뒤로는 파트로 바느질을 가르치며 40~5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어린이집 비용이 아이 둘 합쳐서 24만 원이었다. 둘째는 기저귀에 베지밀 두 개와 젖병을 넣고 어린 집을 다녔다. 감기와 폐렴을 큰애 작은애 번갈아 달고 있던 시절이니 참, 군자금과 무기가 부족한 독립의 길은 혹독했다. 군자금이라면  돈일 것이고 무기는 내 체력, 정신력, 그리고 주변의 응원일 것이다.


  전남편이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이지만 혈기가 있는 꽉 막힌 경상도 남자였다. 아무리 자기가 사과를 하고 선물을 갖다 바쳐도 내 반응과 표정이 외도를 들킨 이전과 다르니 지도 재미가 없었겠지.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리액션을 해 줘야 하는데 나는 그게 되질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이전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전 남편의 행동들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매사 싸늘한 반응이니  둘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복을 배우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바느질을 가르치며,  남편의 일가나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가 뭔가를 하면 잘 해내고 사람들도 잘 사귄다는 걸 아는 전 남편은 불안했나 보다. 내가 자기를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때부터  독립을 방해하는 억압과 통제가 들어왔다.  마치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면 그 외의 의무나 책임은 큰 시혜를 베푸는 듯이 했다.  자기가 아빠 역할한 것을 내세우며 나에게 모성애라곤  없다고 비난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아이를 떼어 놓고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허영심으로 몰아붙였다. 내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불만이 많아 일탈을 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책을 읽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내가 지보다 아는 게 적어야 지배하기가 수월한데 아는 게 많으면 억압이 수월치 않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분함을 달랠 길 없어 일기를 썼고 나는 끊임없이 내가 인내심이 부족한 나쁜 엄마인가를 반성하고 반성했다. 풀리지 않는 억울함은 내가 성격이 모가 나서인 줄 알았다.


    저고리를 배울 때, 안감 겉감을 붙여 박아놓고 빨리 뒤집어서 보고 싶어도, 아이를 재워놓고 같이 깜빡 잠이 들었다가 새벽 한 시나 두시에 깨어 바느질을 했다. 색동저고리를 박아 놓고 얼른 뒤집어 보고 싶었다. 아이를 재우고  살짝 무 뽑듯이 몸을 빼서 바느질 방으로 갔다. 한참 신나게 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벌컥 열며, "당신 귀신 들린 거 아냐? 자다가 나와서 왜 이래?" 하더라.

 

    결혼한 지 3년 반 만에 바람을 피웠고, 그걸 온 아파트 떠들썩하게 나에게 알려줬다. 들키지나 말던지. 다시 3년 6개월 동안 무수히 싸우며 독립을 위해 힘을 키우는 나에게  '제도적으로 안정된 아내 자리'라는 당근과 그걸 버리면 '나쁜 엄마'라는 협박을  번갈아가며 주저앉히려 했다. 아마 독립을 준비하던 시기에 나를 내버려 뒀더라면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미싱에 앉는 열정을 못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일기를 쓰며 내 억울한 심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나는 맨날 쳇바퀴를 돌다가, 자식 봐서 참아야지 하는 뻔한 정신승리로 비겁하게 타협하고 식민지인 채  꾸역꾸역 살았을 것이다.


   바느질을 배우며 경제적인 자신감이 생긴 것도 크지만 내 인간관계 위주의, 내 영역을 만든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남편과의 대화가 재미없으니 책을 읽으며 옳고 그을 분별하는 내 안목을 가진 것도 다행인 일이다. 혼자 사는 연습을 위해 쌀 통을 옮기는 것도 책장을 옮기는 것도 혼자 해 봤다. 한 모퉁이 옮기고 다른 한 모퉁이 옮기고 하니 시간이 걸린다 뿐이지 못 할 것도 없더라. 남편 집안 쪽의 행사는 일주일 전에 싸움을 벌여 웬만하면 가지 않았고 친정의 행사는 혼자 가는 연습을 했다.


   더 이상 참는 것이 내 비겁함과 두려움의 결과이지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나는 남편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오히려 싸움만 커졌고 돈에 대한 감시와 통제만 더 심해졌다. 나는 소송을 준비해야만 했다.  3년 묵은 외도 사실을 가지고 이혼을 성사시켜야 했고, 위자료도 받아야 하는 큰 소송을, 돈 없이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뒤져가며 준비해야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혼 독립 만세!!

내가 원하던 대로 이혼을 했고 위자료도 받았다. 다음 편에서 변호사도 감탄한 위자료 청구서를 쓰는 요령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완전 영업 비밀 대 공개.


병 속에서 자신의  날개를 잊은 많은  여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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