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라는 게 놀랍다. 그때 모유를 먹던 아들이 군대를 마치고 직장을 다니니 말이다. 오월이었던 것 같다. 두 돌이 지난 큰 애를 재우고 작은아이 모유를 먹이고 있었다. 전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현관문을 사납게 발로 차는 소리에 놀라서 남편이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등산화를 신은 남자가 화다닥 거실로 뛰어 들어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거실의 살림살이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했고 거실벽에 붙은 사진을 깨기 시작했다. 뒤이어 들어온 남자의 아내는 자기 남편을 말리다 오히려 그 야구방망이에 맞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불과 몇 주전에도 가족 모임을 하며 저녁을 먹었던 사이였다. 나는 남편 친구의 폭력을 막으며 때리지 말라고 여자를 안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나에게 말리지 말라며 자기의 아내와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다. 한 밤중, 아파트에서 물건 부수는 소리, 울음소리, 고함소리가 요란하니 누군가 신고를 하여 경찰이 왔고 남편과 남편의 친구는 경찰서로 갔다.
정말 간절히 간절히, 그 남자의 오해이거나 의처증 같은 것이길 바랬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남편은, 자기의 친구가 오해를 했다고 말했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다음 날 남편의 친구는 남편의 회사로 업무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회사의 여러 부서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남편과 자기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으니 남편을 해고시키라고 했다. 이때까지도 난 남편의 친구가 의처증 환자인 줄 알았다.
며칠 동안 남편의 친구는 회사로 전화를 했고 나는 남편의 누나 집에 며칠 가 있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이, 전라도 쪽에 있는 계열사로 가든지 회사를 그만 두든지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제서야 모든 일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남편 친구의 와이프, 즉 상간녀라고 추정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모든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남편의 선배가 출마를 하여, 남편이 퇴근을 했다가 선거 사무실에 들러 본다며 나가 밤늦게 들어온 적이 몇 번 있었다. 선거 사무실에 잠깐 들르고 그녀가 하는 피아노 학원으로 가서 만났다고 한다. 그러기를 6개월, 그러니까 내가 둘째를 낳기 전에 진행되던 일이었다.
큰 애가 두 돌, 작은애는 모유를 먹는 갓난쟁이. 큰애 이유식, 작은아이 기저귀 빨래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던 20대 아기 엄마가 갑자기 '사랑과 전쟁'에 나올만한, 추잡스럽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불륜 드라마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걸 알게 되었다. 와장창 살림 부서지는 소리와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좀 더 있다 하라고 말리는 결혼을 한 후, 3년 반 만에 일어난 일. 이런 일은 뉴스에서나 있는 줄 알았더니 나에게도 일어나더라. 아침에 눈을 뜨면 꿈이길 바랬고, 밤이 오면 아침이 오지 않길 바라는 시간을 보냈다. 결국 조기 퇴직 신청을 해, 보통보다 약간 더 많은 퇴직금을 받는 걸로 결론을 내고 시가가 있는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바람을 핀 그녀도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도 안쓰럽다. 두 아이를 키우며 피아노 학원을 했고 남편은 건축일을 하다 보니 집을 자주 비웠다고 했다. 친정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별 다를 것도 없는 남의 남자를 만나러 밤마실을 나갔던 것이다. 두 애기의 엄마이니 자기도 죄책감은 있었을테니 말이다.
남편의 친구가 우리 집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때, 벽에 남편이 서예 연습을 하며 써 붙인 명심보감 구절을 떼며 한 말이;"개새끼야, 난 이런 걸 몰라도 너처럼 안 살아." 하던 모습을 나는 어리둥절하게 봤었다. 그녀는 내 전남편의 열라 그럴 듯이 터는 말빨에 혹 했을 것이고, 그 남자는 그게 꼴사나웠던 게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하면, "어떻게 살아? 당장 이혼해야지." 하며 충고할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직접 겪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이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골로 이사를 하고 이혼을 실천하기까지 다시 3년 반을 더 살았다.
남편의 외도를 안 이후의 삶에서, 외도 자체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는 금방 옅어졌다. 하지만 신뢰를 잃은 남자와 사는 건 전화번호부를 읽고, 외우는 것 같은 고역이었다. 전남편이 하는 일상적인 얘기에 공감이 하나도 안되고 무슨 얘기를 해도 난 속으로 비웃었다. 반찬 투정을 하면 '웃기네, 니가 그럴 자격이 있어?' 아이 교육에 의견을 내면, '그래? 그렇게 잘 아는 인간이 둘째 임신한 아내를 두고 딴 여자를 만나러 나갔냐?' 이렇게.
이 불행한 결혼을 계속해야 하나, 끝내야 하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결론 냈다 뒤집었다 하느라 늘 머릿속은 분주했다. 그러면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했고, 한복을 좋아한 나는 한복 바느질을 배웠다. 직업훈련 학원에서 바느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혼을 한다 해도 남편 돈으로 경제적 자립 비용을 치른 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이혼 계획의첫 단추였다.
20년 전 얘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마당이니, 오늘까지 오려면 길이 멀다. 여기서 끊고 외도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한다면,
"지금 지옥 체험 수업하러 가는 중이니, 안 들켰을 때 빨리 발 빼세요"
안 들킬 자신 있다고?
바람피운 당사자, 배우자만 모를 뿐 주변에선 금방 눈치를 챈다. 거짓말 수십 개를 지어내야 되니 티가 안 날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들킨다. 왜냐하면 들킬 때까지 하기 때문이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사랑> 같은 로맨스를 꿈꾸다 <경찰청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칫하면위자료까지 물어 줄 수도 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한복 바느질을 배우러 다니며 만난 텃밭에 핀 도라지꽃. 도라지꽃의 보랏빛이 꼭 내 가슴에 멍처럼 푸르구나 싶었다. -다녕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