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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Nov 13. 2019

엄마, 저 이혼하려구요

딸의 이혼을 대하는 부모의 자세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러셨다. "넌 어째 일해서 돈 벌 생각을 안 하고 시집갈 생각을 하냐?".., 그러게 말이다. 사회경험도 없이 말리는 결혼을 했다. 이번엔 온식구 울면서 말리는 이혼을 하게 생겼다. 결혼 한 지 7년 만에 6살 5살 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전남편의 외도로 얼렁뚱땅 사표를 쓰고, 전남편의 고향인 문경으로 오게 되었을 때도 부모님께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꾸역꾸역 살아 볼 작정이었다. 3년간의 고민 끝에 법원으로 소송장을 낸 후에야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친정과 남편의 고향이 30분 거리로 가까웠지만  소송 중에 친정으로 가지는 않았다.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힘든 일을 겪으면 내 인생의 인간관계가 걸러진다는 걸 배웠다. 물론 위로를 하고 다독여 주는 사람도 있다. 굳이 내 아픔을 공유하고 싶지도 않은데 후벼 파서 위로를 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위로에는 내 불쌍함을 확인해서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고픈 맘이 숨어있다.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이 연기를 해도 다 보였다.


친척 중에 몇 명, 친구들 중 몇 명, 동네 엄마들 대부분이 그랬다. 인간관계에서 내 아픔을 내 보이기 꺼려지는 사람은 내 생활에서 살짝 밀어냈다. 이혼을 했으면 불쌍하고 처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 실망하는 인간도 있었다. "이혼했다더니 좋아 보이네. 밝아서 좋다." 아니 그럼 이혼했다고 맨날 울면서 다니냐?


헬스장을 다니며 운동을 시작했다. 거기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어디서 내 소문을 들었나 보다. 그 친구는 다른 동창 친구 이혼 한 얘기를 하면서 내 얘기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혼한 애들 많으니 괞찮다는 위로비슷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 친구만의 배려있는  대화 방식인가 보다. 그러려니 했다.


친구나 친척은 멀리해도 내 인생에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달랐다. 이혼 소송이 합의로 완전히 끝난 후에야 친정을 갔다. 엄마는 동네에서 입 무겁고 살림 솜씨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평소 엄마의 자랑은 참는 거 하나는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싸우는 것보다 나하나 숨죽여 살면서 평화롭게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 그게 엄마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딸이 참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니 속이 상하셨겠지.


하지만 엄마는 나의 미래에 대한 염려보다는 동네에 창피한 게 더 컸나 보다. 전남편이 허우대나 직장이 멀쩡했고, 시댁도 나름 시골 부자였다. 종갓집에 제사가 열 번이든 뭐든 그저 무난한 여념집 주부의 자리에 있어주길 바랬다. 엄마가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에 언제나 당신 맘대로 인 분이셨다. 지금은 연세가 있으셔서 본의 아니게 자상해지셨지만 예전엔 온 가족을 힘들게 하는 인간형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성향은 남의 시선에 별 신경을 안 쓴다는 게 장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습관과 남 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태도는 내게  평생의 자산이 된 듯하다.


엄마의 인내심과 아버지의 독선적 성향이 독립을 하려는 내게  좋은 자질이 되었다. 이혼을 결정할 때, 남 눈 의식하다가 내 안에 골병을 키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된 가부장적 관습을 내가 참지 않음으로써, 대를 끊어야 되겠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있었다. 내가 전남편의 가부장적 태도를 참으면, 아들은 아빠의 태도를 그대로 학습할 것이고, 딸은 나의 인내심을 또 배울 테니까.


이혼 소송 중에 전남편이 친정으로 가서 나를 좀 설득해 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나의 태도는 워낙 단호했으니 부모님은 나를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좀 참고 살아 보라고 넌지시 돌려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왜 이혼하려느냐, 앞으로 어떻게 살래? 이런 질문은 일절 않으셨다. 엄마가 나에게 묻고 다그칠 때 , 그저 옆에서 그럴만하니까 했겠지, 애좀 가만 놔둬. 하셨다.


그리고는,

 "밥 잘 먹고 택시 타고 다녀라. 버스 타지 말고. 돈 없으면 집에 올 때 전화해. 내가 택시비 들고나가 있을게." 아버지가 내 이혼에 대해 하신 말씀은 이게 다였다.


평생 동안 무서운 아버지에서 든든한 아버지로 빚을 다 갚으셨다.

"택시 타고 다녀."이 한마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받고픈 사람, 그 사람만 사랑해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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