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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Jun 04. 2020

한국생활 12년, 흑인이 전하는 미국 시위

남편이 일주일간 침통해하다가 쓴 글을 제가 옮깁니다.



1988년 9월 18일, 스펜서 셔먼은 UPI에 “한국의 학생운동: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사진이나 텔레비전에 보이는 급진적 운동권 학생들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라고 시작되며, 기사는 계속됩니다.


“한국의 서울 거리는 다시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정부에 저항하는 일부 학생들이 대학 주변에서 시위를 한다. 격한 시위는 산발적이며 침착하다.”


On 18 September 1988, Spencer Sherman wrote a story for the news agency, United Press International (UPI), which had the headline, “South Korean Student Protests: Don’t Always Believe Your Eyes.” He writes from Seoul, and begins his reporting, “When you see photographs and television images of radical South Korean students hurling rocks and firebombs, don’t always believe your eyes.”


Mr. Sherman continues, “It might have looked like the streets of Seoul were aflame again last week, but the reality usually is that only small bands of committed anti-governments students are clashing with police around universities. The violence is sporadic and contained.”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된 일주일 후부터 시위가 일어 났습니다. 미디어에 보이는 시위의 모습은 건물과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화염 폭탄을 던집니다. 또한 물건을 훔치는 ‘폭동’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셔먼이 기사를 인용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The events occurring a week or so after the murder of George Floyd in Minneapolis seems to depict  people hurling rocks, firebombing buildings and police cars, as well as looting. I agree with Mr. Sherman that you can’t always believe your eyes.


1919까지, 일본의 통치에 대한 저항은 3.1 만세운동으로 시작해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정치적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비정치적 활동으로도 많은 한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본의 가혹한 탄압은 일본 식민정부에 대한 공격을 촉발하기도 했고, 일본인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By 1919, the opposition to Japanese rule sparked resistant movements, as you are aware, known as the March 1st Movement. Thousands of Koreans were arrested for political and non-political activities. The harshness of Japanese control of the Korean Peninsula triggered often violent reprisals from Koreans towards the Japanese ruling authority as well as its citizens.


일본 정부는 한국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가혹한 법을 만들어 통제하고 수탈을 했습니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인종적으로는 같은 계열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문화적으로 한국이 열등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식민지 침략을 하였습니다.

The Japanese of that era did not consider Koreans their equals, so it was simple to enact draconian  laws and conduct vicious assaults on Korea and her citizens. Yet, there is racial homogeneity between Koreans and Japanese, but the difference layed within the heterogeneity between the cultures.


1926년, 순종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6.10 만세운동에서는 천명 이상의 학생이 체포되었습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구속은, 자기의 조국에서 일본의 억압과 통제에 살 수 없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In 1926, during the June 10th Movement anti-Japanese rally during the funeral of Sunjong , more than a thousand students protesters were arrested. Their arrests were caused by their desire to live without repression and being subjugated in their own country.


많이 들어본 얘기인가요? 억압에 대한 기억은 한국의 유전자 문화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식민역사에서 한국인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국에서 아프리카 계열의 미국인과 같습니다.

Does this sound familiar? The familiarity and atmosphere of oppression is still within the genetic and cultural memory of Korea. Korean people were treated as second class citizens by the Japanese people, like American-Americans have always been treated in America.


좀 더 최근의 역사로 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열흘간의 항쟁은 수 천명의 사상자를 발생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계엄령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부군은 강간, 폭력, 총격으로 민간인과 전남대 학생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광주 항쟁의 장면들은 최근에 일어난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보다 참혹합니다.

However, in the more recent memory, the nearly 10 days of struggle in May 1980 during the Gwangju Uprising  caused the deaths of thousands of people. Gwangju residents robbed armories and police stations for guns to fight against martial law. The government troops reportedly raped, beat, shot, and killed local residents and students from Chonnam University. The scenes of this situation, to western people, were worse than those seen during the current protests about the murder of George Floyd in the US.





최근 미국에서의 시위는 단지 미국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아직 없습니다만, 시카고에서 벨파스트로, 파리, 시드니, 로마까지, 미국에서 일어나는 흑인 차별에 역겨워합니다. 저는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장면을 보았고, 실제로 신체적 아픔을 느꼈습니다. 2014년 7월 17일, 에릭 가너는 질식사를 당했습니다. 그는 지금 구호가 된,  한마디를 외쳤습니다. “I CAN’T BREATH.”라고.  에릭 가너는 불법 담배 판매로 구속되었고 이는 비폭력 범죄입니다. 그 경찰은 전혀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브라운은 경찰에 의해 6번의 총격을, 뒤에서 당했습니다. 2014년 10월 20일, 르콴 맥도널드는 16번의 총격을 경찰과 5미터 떨어진 곳에서 당했으며 이 또한 뒤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And while these protests are not limited to the US, they are not found in Asia. From Chicago to Belfast to Paris to Sydney to Rome, normal people are disgusted by the continual mistreatment of African-Americans. I watched the video of George Floyd being murders and I felt physical ill. Eric Garner was choked to death on 17 July 2014. He cried the now famous words, “I can’t breathe” as a policemen choked the life out of him. Eric Garner was accused…accused of a non-violent crime: selling individual cigarettes. The policemen were never charged by the prosecution. Michael Brown was shot 6 times in the back by the police. On 20 October 2014, Laquan McDonald was shot 16 times in the back while he was more than 5 meters away from the police.


2014년 11월 22일, 타미르 라이스는 경찰에게 총격을 당했을 때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타미르는 혼자서 장난감 총을 가지고 공원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경찰을 경찰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총격을 가했습니다. 2015년 4월 4일, 월터 스캇은 자동차의 미등 고장으로 경찰에게 단속이 되었습니다. 월터 스캇은 경찰에게 말을 하려 했으나 경찰은 뒤로 물러 납니다. 경찰은 8발의 총을 쐈고 5발이 월터 스캇의 몸에 맞아 사망시켰습니다. 2016년 7월 6일, 필란도 캐슬(32세)은 아내와 아이와 함께 차에 있었습니다. 필란도 캐슬은 합법적으로 등록된 총을 자동차 앞 사물함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가 총을 가지고 있냐는 질문에 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자 총격을 가해 살해했습니다.

Tamir Rice was 12 years old on 22 November 2014 when a policeman shot and killed him. Tamir Rice was in a park playing by himself with a toy gun. The policeman didn’t even get out of his car. On 04 April 2015, Walter Scott was stopped by the police for a broken tail light on his car. Walter Scott talked to the police but then started to walk away. The policeman fired 8 shots but only 5 hit Mr. Scott to kill him. On 06 July 2016, Philando Castile, age 32, was sitting in the car with his partner and their child. Mr. Castile had a legally registered gun in the car’s glove compartment. Upon telling the police he had the gun, the police shot and killed him.



 이것은 미국에서 지난 10년간 일어난 법적 절차를 벗어난 경찰의 흑인 살해의 작은 예입니다. 살해된 흑인들은 비폭력 범죄이거나 심지어는 무고한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저널, 알 자즈라에 의하면 2020년 3월 31일 현재, 미네소타 인구의 5%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미국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의 20%가 미네소타에 있다고 합니다.

This is just a very tiny sample of the extrajudicial killings of African-American men just over the last 10 years for either a non-violent crime, as with Eric Garner, or no crime at all. The Al Jazeera news organization reported, on 31 May 2020, that although African-Americans represent just 5% of the population of Minnesota, they comprise 20% of those shot to death by police.


참고로 설명을 더 드리자면, 이런 가혹함은 법을 어기거나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한 흑인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흑인으로서, 저는 미국을 갈 때마다 긴장을 합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영국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한국에 오기 전 비자를 받기 위해 심사를 받았습니다. FBI 범죄경력 조사를 습니다. 당시 시간이 촉박하여 하원 원인 존 보헤너의 도움으로 신속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집을 방문하면 의심스럽게 보인다는 이유로 총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In case you’re wondering, it’s not only the Black men who skirt the law who are subject to this. As an African-American man, I am always nervous every time I go home. I have undergraduate and graduate degrees from US and UK universities. I was thoroughly vetted  in order to get a VISA here. I had criminal background checks from the FBI, which was expedited by the office of John Boehner, who was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and third in line for the presidency. However, I could go home and get shot because the police thought I looked suspicious.


대부분의 흑인 부모님은 아들과 ‘그 대화’를 합니다. 이 전통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 부모님은, 경제적 배경과 관련 없이 아들에게 특별한 ‘대화’를 전달합니다. 백인 경찰에게는 특별히 조심하고 존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흑인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오직 흑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종주의 단체 KKK 나 인종 차별주의자들 단체는  경찰, 법조인, 시장, 주지사들이 지도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항상 법에 저촉되어 송사에 연루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경찰에 의해 총격을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Most African-Americans parents have “THE TALK” with their sons. This goes back at least 100 years. African-American parents from all backgrounds, poor to rich, tell their sons to be especially courteous and respectful to white police officers. They know their sons could be killed or arrested just for being “Black.” Most of the leaders in the Klu Klux Klan and other racist hate groups were police officers, judges, mayors and governors. So, Black people have always had to be wary of law enforcement. So, being from a middle class background and educated, that doesn’t give me immunity from being killed by the police.


경찰들은 많은 범죄에서, 특히 살인에서 면책권을 받습니다. 우선, 증거 영상이 없으면 대부분 경찰의 말을 믿습니다. 경찰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면 구속이 됩니다. 관습적으로 그렇게 해 왔습니다. 경찰이 당신의 말투나 쳐다보는 눈빛이 맘에 들지 않으면 당신은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부분의 미국인도 잘 모르는 점이 있습니다. 경찰이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영상 유무와 관련 없이 무사통과가 됩니다. 저 말은 무법의 면죄부가 되어 주었습니다. 설령 경찰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도 배심원들은 좀처럼 유죄를 표명하지 않습니다

Police are exempt from many crimes, especially murder. First of all, without video evidence, everyone believes the police. If a police officer said you did something wrong, you’re arrested. Traditionally, that’s how it was done. The police officer didn’t like the way you talked or the way you looked, you were in trouble. More importantly, there is one thing most people, even Americans, do not know. If a police officer says, “I felt threatened for my life,” that gives them carte blanche to kill someone, with or without video evidence. Those are the magic words, and, even if the police officer was arrested, very rarely will a jury convict him.


 제가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사람들에게 많은 친절을 경험해 왔습니다. 제 첫 직장은 경북의 용운 중, 고등학교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직원들은 모두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경북 상주의 모든 이웃들은 나를 지역 주민으로 받아주었습니다. 학부모님들도 제가 고향에서 겪은 엄마들과 같았습니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마다 저에게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Still, since I’ve arrived here, I have been treated with nothing but kindness by the Korean people. My first job in Korea was a Yongun Middle School in Sangju, Gyeongsangbuk-do. The teachers and staff treated me like I was family. The entire community embraced me as one of their own. Korean mothers are the same as those I grew up with. They want to feed you!


하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후 미국 시위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을 방송하는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몇몇 편집된 방송에서, 폭력과 도난이 있는 것을 보고 ‘저러니까 흑인을 차별하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놀라고 아픔을 느꼈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일제시대에 CNN이나 BBC, 혹은 다른 뉴스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보도자료를 내놓았을까요?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한 한국인은, 일본인을 거쳐 세계로 나간 뉴스를 보고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광주의 항쟁은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광주 항쟁에 관해서 세계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저는 광주에 관한 뉴스가 미국에서 보도되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당시 미국의 뉴스들은 한국의 광주를 폭동으로 묘사했었고, 많은 백인들은 자신이 보는 뉴스를 전부로 믿어 쉽게 비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뉴스에 나왔던  많은 몰상식하고  편견에 가득찬 말들을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 만난 훌륭한 사람들로 인해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개인적 경험으로 스펜서 셔먼의 문장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사진이나 텔레비전에 보이는 급진적 운동권 학생들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2020년 현재의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Bradley watkins -현, 충남 서산 한서대학교 근무


 


However, this is contrary to comments I’ve heard from Korean people on the radio about the George Floyd protests. I was genuinely hurt by some of those comments.


Remember, though, if there was CNN or the BBC or any of the other various online news services, how would Koreans be characterized by the Japanese in 1919 or 1926? What would the Japanese say about the people they were ruling? How did Korean men feel when they were constantly being harassed by Japanese soldiers? What did the world say during the Gwangju Uprising? What was the world saying about the Korean people?


I am old enough to remember what white people said in America as they watched the rioting in Gwangju, but I shall not repeat the vile things Americans said at that time.


I just know from my personal experience that Korea is a wonderful place with magnificent people. I also know from personal experience that, as Spencer Sherman wrote in September 1988, “When you see photographs and television images of radical South Korean students hurling rocks and firebombs, don’t always believe your eyes.”


That is also true in the United States in 2020.

마크 브래드포드 작,  150 Portrait Tone (2017), LACMA.  필란도 캐슬이 총격을 당할 때 같이 차에 타고 있던 아내의  인터뷰를작품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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