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녕 Jun 12. 2020

제사 많았던 종부가 이혼을 하면

한식에 관한 공모전 광고를 보면서, 링크에 걸린 ‘기며니’님의 오도독 씹힌다는 하얀 무말랭이 글을 재미나게 읽었다. 외할머니의 북한 식 무말랭이 맛도 궁금하거니와 외할머니와의 역사도 과연 대상 감이었다.


거의 20년 전에 이혼을 하긴 했지만, 명색이 종가 집 종부 노릇 7년을 한 사람으로서 한식 얘기로 뭔가써 보고 싶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이혼녀의 글 감으로는 아귀가 맞지 않았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거의 발명에 가까운 요리를 해온 덕분에 전통의 맛이라곤 없었다. 창작한 내 요리를 아이들 서로 먼저 맛보라고 미루기 일쑤였다. 엄마나 할머니의 음식에 대한 감동적인 스토리도 없다.


무엇보다 엄마가 환자로 누워계셨던 7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와 나는 엄마 솜씨를 흉내 내보려 눈물겹게 애를 썼다. 아버지나 나나 뭔가를 만들어서 엄마가 했던 기억 속의 맛과 견주었다. 시래깃국을 끓여 놓으면, 아버지는 “이 맛이 아닌데..” 하시며 드셨다. 엄마가 겨울이면 자주 해주던 들기름 듬뿍 들어간 시래깃국을 아버지는 늘 칭찬하셨다. 전쟁이 나도 엄마의 시래깃국이면 걱정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렇다고 엄마의 짧고 고단한 인생을 음식 하나로 소환해서 추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을 위해 숨죽여 산 엄마의 인생을, 음식으로 기억하며 낭만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난 뭘 써야 하나? 이혼을 안 했으면 시어머니의 곳간 열쇠를 물려받고, 장독대를 반질반질하게 닦으며 살았을 것이다. 속은 다 썩을 지라도 한복에 무명 앞치마를 둘러매고 꽤나 그럴듯한 종부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쓸것이 많았으려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전남편은 직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시어머니와 안방을 쓰고 시아버지는 사랑채에서 거하는 생활을 6개월간 했다. 명절 제사, 기제사, 10월 시제까지 합치면 매달 한 두 번의 제사가 있었다. 힘들거나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시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셨다. 시어머니는 몇 시에 일어나는지 모를 정도로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 준비를 하셨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이면 아침 준비가 끝나고 이미 행주를 삶고 계셨다. 내가  일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 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함께 장을 보러 갔다. 엄마와 장을 보러 간 기억도 없던 내가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제사 장을 보러 다녔다. 조기를 사고 고사리를 사는 일 조차 사뭇 진지하고 경건해서 놀라웠다. 좋은 물건을 고르고 값을 깎으려 하지 않았다.  통통한 밤을 몇개 더 얹어 달라고 할지언정 돈을 덜 주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경상도의 제사음식이라 하면 별로 먹을 것이 없다. 산나물 종류에 떡, 전 몇 가지가 다이다. 해물이 많이 없는 지역이라 조기가 생선의 최고로 대접을 받는다. 전남편 집 동네는 고등어를 제사상에 올렸는데 그것도 요리를 하지 않은 간 고등어를 전 위에 한지를 깔고 올렸다. 고등어를 제사상에 올린다는 것이 놀라워서 친정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생 고등어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종가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라 하셨다. 요리를 한 조기는 즉시 먹어야 하지만 요리를 안 한 고등어는 종가에서 보관했다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일을 체계적이고 수월하게 하는 분이셨다. 탕 국을 안치고 전을 부치면서 떡을 찌는 일을 동시에 진행하셨다. 오후 나절에 준비를 시작해서 저녁을 먹고 나물을 무치고 조기를 쪄 놓으면 10시쯤에 한 숨 잘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30분 전에 일어나 상을 차리고, 12시에 제사를 지내는 시스템으로, 제사가 그저 늘 있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전을 부치면서 몇 개 집어 먹고 저녁을 먹지 않아야 제사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제사를 지낸 후 먹는 제사 밥은 별것도 없는데 꿀 맛이었다. 산채들과 비빈 밥에 짭짤한 조기의 중간 토막의 살코기는 잘 어울렸다. 무와 다시마로 맛을 낸 시원한 국물은 비빔밥을 잘 넘어가게 해 주었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비빔밥의 고명으로 깨소금과 함께 다시마부각 가루를 얹는다. 튀긴 다시마를 절구에 넣고 쿵쿵 찧어 가루를 내면 검정깨같은 모양이 된다. 비빔밥에 달달하게 녹아들면 뒷맛에 바다냄새가 남는다.


 시어머니는 제사 밥을 좋아하는 나를 보고, “종가 집에 시집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 하셨을 정도였다. 시어머니의 일 머리 있게 처리하는 솜씨를 나는 금방 배웠다. 시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제사 준비를 혼자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오전에 장을 봐서 오후에 준비를 시작해도 제사상을 뚝딱 차려 낼 만큼 준비된 맏며느리였다. 옆에서 전 남편이 왜 제사 준비를 안 하냐고 조바심을 내며 재촉을 할 정도였다.


 제사 음식 준비를 얼마나 잘했던지, 전남편은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자랑을  했다. 동료나 친구들 모임을 집에서 하면 헛 제사 밥을 준비하곤 했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더 들여도 진짜 제사를 지내고 먹는 맛과 달라서 전남편과 나는 항상 신기해했다. 음식은 음식 자체도 중요하지만 긴 노동과 수고로운 형식을 거쳐야 맛이 있는 것 같다.


제사 밥은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12시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틸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11시 이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제사를 지낸 후 아버지가 제사 밥을 먹이려 깨워도 못 일어난 적이 많았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엄마에게 왜 깨우지 않았냐고 화를 내다. 놓친 제사밥이 아까워서 였다.어쩌다 잠이 깨어 제사 밥을 먹은 날이면 자다가 일어 나서도 한 그릇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엔, 제사 밥을 먹은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내가 이혼을 한 몇 년 후, 엄마는 환자가 되셨다. 친정 제사와 명절 준비를 내가 했어야 했다. 종부 노릇 7년에 제사상을 차리는 일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퇴근을 해서 제사 준비를 해12시 10분 전에 상을 세팅 해 놓았다. 종부 노릇 7년에 얻은 것은 제사 준비를 힘들이지 않고 기계적으로 하는 솜씨였다. 어지간해선 칭찬을 잘 안 하시는 아버지도 명절이면 수고했다고 하시며 그만 좀 쉬라는 다정한 말씀을 하실 정도였다.

 

엄마에게 배운 것보다는 전 시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더 많아서 가끔은 옆에서 보던 동생이 물었다. 송편을 해서 솔잎을 뿌려 찌는 것을 보고 “언니, 엄마는 이렇게 안 했던 것 같은데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이거? 우리 전 시어머니한테 전수받았지.” 하면서 둘 다 어이없이 웃었다.


나에게 제사 밥은 새댁의 아픔이고, 서투름이고 젊은 날이다. 20대 그 좋은 나이에, 누군지 본 적도 없는 전남편의 조상을 위해 음식 준비를 했다. 이제는 전 시부모님이지만, 좋은 분들 이셨고 좋은 관계였다. 전 남편 덕분에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애매한 관계가 되었다. 가끔은 그때 먹던 제사 밥과 탕 국의 맛이 그리워진다. 아니면 젊은 새댁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제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일은 번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지 않았던 것은 제사 밥의 담백한 맛이 좋아서였다. 제사 속에 담긴 많은 불평등과 엄마들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제사 밥에 분노해야 마땅하다. 친정 엄마의 억울한 세월과 시어머니의 또 다른 억울한 세월이 엮여서 새로운 제사 밥에 대한 기억이 만들어졌다. 엄마의 말없이 참고 희생했던 모습은 씁쓸한 도라지로 기억된다. 시어머니의 야무지고 자부심 있는 종부의 모습은 꼬들한 고사리처럼 품위 있다. 두 가지 나물이 참기름과 비벼져서 내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전 시어머니와 돌아가신 친정 엄마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추억의 사람들이 되어 젊은 날의 제사가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서 먹던 음식을 추억하실 때, 아픔과 초월, 회한이 느껴졌다. 마음놓고 추억하기도 힘든 아픔이 있으셨을 듯하다. 내게 제사 음식이 그렇다. 낭만적으로 추억하기에는 너무 아픈 음식이다. 장사 지낸 내 젊은 날이 굴비처럼 말라 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싫어 할 수도 없이 인이 박혀서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정을 떼고 싶은데 그것도 힘들다.


명절이 지나면 딸에게, 집에 있는 할머니 음식을 좀 싸다 달라고 한다. 딸아이는 할머니의 멋이라고는  없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뭘 싸다 주느냐고 난감해한다. 나는 다른 건 필요 없고 나물과 탕 국을 좀 싸다 달라고 한다. 딸아이는 진심으로 이 음식이 왜 먹고 싶냐고 되묻는다. 그러게, 전 시어머니 제사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어이없는 이혼녀라니.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긴 하다.


나도 한 때는 태평양을 누비고 다녔다오, 이제는 제사상에 오를 지언정.


https://brunch.co.kr/@red7h2k/32

https://brunch.co.kr/@red7h2k/80


작가의 이전글 한국생활 12년, 흑인이 전하는 미국 시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