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해 조금만 지루하면 재미를 발명해 내며 살아왔다. 아이들과 구구단 외우기 연습을 시킬 때도 죠리퐁을 놓고 구구단 놀이를 했다. 엘베 없는 빌라 3층에 살 때, 쌀을 들고 갈 수가 없어 바가지에 퍼서 나른 적도 있었다. 아이들과 재미나게 전달 전달하며 쌀을 나르니 아래층 할머니가 시끄럽다고 짜증을 냈다. 그래도 우리는 낄낄거리며 쌀 반 자루를 바가지로 옮겼다. 그야말로 우공이산이었다.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언제나 재미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긴 시간을 짧게 느낄 때이다. 시계를 볼 틈도 없이 한 시간이 후딱 갔다면 그 일은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다. 시간은 정말 안 가고 몸은 고통스러운데도 재미있는 일이 있다. 바로 운동이다. 운동을 하면 땀으로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몸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이것도 호르몬의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의 소리에만 몰입하는 즐거움이 있다. 또한, 운동을 마쳤을 때 느끼는 몸의 가벼움과 잘 살고 있다는 기특함이 있다.
대학 1학년 교양 체육으로 수영을 배웠다. 자유형, 배영, 평형을 배우고 접영을 하기 전에 한 학기가 끝나 버렸다. 그때 배운 수영으로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다. 혼자 수영을 해 온지라 늘지도 않고 자세도 좋지 않은 듯하다. 수영을 천하태평으로 느릿느릿하다 보니 수영장 레인에서 교통 체증이 생긴다. 그러면 추월해서 가라고 살짝 비껴준다. 빨리는 못 해도 쉬지 않고 얼마든지 오래는 할 자신이 있다.
이사를 가든 여행을 가든, 어디라도 수영장부터 먼저 찾아 놓는다. 남편이 중국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를 한 덕분에 학교 사택에서 산 적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 한편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습한 광저우 기후에 수영장은 나의 애착 장소가 되었다. 한 번은 혼자 수영장을 독차지해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옆을 보니, 수영 수업을 하려고 온 학생들이 강사의 자세 설명은 듣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얼른 수영장을 빠져나왔다.
아이 둘을 돌 때까지 모유로 키우고 몇 년 만에 수영을 하러 갔다. 수영복을 입어 보니 세상에나 가슴이 거의 배 중간까지 처져 있었다. 수영장 레인 끝까지 갈 수가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짜증이 났던 것이었다. 아이들이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아도, 거실 바닥에 장난감을 다 퍼뜨려 놓아도 내 체력이 되면 화가 나지 않는다. 내 몸이 피곤하면 일을 하기가 겁이 나니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그 후로 수영복 바구니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틈이 날 때마다 수영을 했다. 가슴은 다시 올라 붙고 한 시간은 끄떡없이 수영을 하는 체력이 되었다.
수영을 하러 가기 전에 정말 천 번은 흔들려야 발길이 나서 진다. 맘을 먹기가 힘이 들지만 꾸역꾸역 수영장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수영복을 입는다. 수모를 쓰기까지도 하기 싫은 맘이 가득한데 귀를 딱 막으면 흥분이 쫙 온다. 등줄기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슴이 뛰는 것이 꼭 그분이 들어오는 것 같다. 독한 커피를 마셨을 때처럼 척추가 세워지면서 뒷골에 흥분이 촤르르 흐른다. 물에 첨벙 들어가면 처음에는 물이 차갑지만 한 바퀴만 돌면 물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열 번 정도 돌면 물이 실크처럼 부드럽게 나를 만져 주는 것 같다. 크림처럼 보드랍게 내 몸에서 흐르는 듯하다.
수영은 음악을 들을 수도 없고 옆 사람과 얘기를 할 수도 없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운동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물이 차서 추워진다. 움직여야 춥지 않으니 나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시간은 또 어찌나 안 가는지 일 분, 일 분을 온몸으로 측정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도 일 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여섯 번 흐르면 한 시간이 되는 게 신기하다. 일 분을 일 분 보다 빨리 흐르게 할 재간이 없는 곳이 수영장이다. 온몸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마치면 아무리 꼼꼼히 샤워를 해도 들썩일 때마다 락스 냄새가 난다. 그 냄새도 기특하다.
남편이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my beautiful mermaid’라고 불러준다. 이 얘기를 친구에게 해 줬더니, “ mammoth를 mermaid로 잘못 들은 거 아냐?” 한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그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렇게 말했던 걸 기억하느냐고. 그 친구는, “기억은 안 나는데, beautiful mermaid는 지금 들어도 불편하긴 하다.” 해서 함께 웃었다.
mammoth-from pintrest
mermaid- from pintrest
수영의 매력은 귀마개에 있는 듯하다. 귀마개를 하는 순간 내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근육의 움직임, 심장 박동, 몸에 닿는 물의 느낌 하나하나 생생하게 소리로 느껴진다. 내 몸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도 듣는다. 나에게만 집중하는 장소로 조용한 카페보다는 시끄러운 수영장이 의외로 낫다. 수영을 하면서 명상을 한다는 어이없는 논리이지만 내 경험으로는 분명히 효과가 있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지고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이 반짝 떠지는 신선함은 덤으로 온다. 몸이 가벼우면 설거지가 쌓여 있어도 목욕탕 바닥에 머리카락이 어질러져 있어도 너그러워진다.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것이 고통 스럽지만 그 안에서 재미를 발명해 내야 한다. 운동 후에 죄책감없이 먹을 수있는 치킨이 될 수도 있고, 산에서 만나는 예쁜 꽃이 될 수도 있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면 음악이나 팟캐스트가 재미를 주기도 한다. 재미의 요소를 많이 발견해 놔야 운동이 즐겁고, 즐거워야 자꾸한다. 자꾸하다보면 어느새 내 몸이 달라져 있다는 걸 느낀다.
자꾸만 짜증이 나고 남의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면 신호이다. 마음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마음을 담는 몸이 더 문제일 수 있다. 기분도 몸에서 나오고 이해심, 여유, 즐거움이 대부분은 몸에서 나온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힘들지만 몸의 환경을 좋게 하는 것은 간단하다. 움직이면 된다. 내 몸이 상쾌하면 반찬 타박을 해도 관대해지고 억지를 부려도 측은지심이 생긴다. 내 몸이 피곤하면 천하를 가져다줘도 웃음 짓기 힘들다. 사소한 것에도 서운함이 자꾸 쌓인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는 맘이 커지면 몸이 지친 게 아닌지를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 이해심과 공감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도 체력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분이라는 게 단순해서 커피 한 잔에도 좋아진다. 운동전에는 농부가 막걸리 마시듯이 커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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