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꾸꾸 Feb 09. 2023

같은 카페에 가는 이유

휴식의 의미


내가 사는 동네에 아이스라떼가 엄청 맛있는 카페가 있다. 배트콩카페라고 경희대학교 대학가에서 아주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카페인데, 이 카페 주인아저씨는 정말 스몰토크의 달인이시다. 나는 항상 기계처럼 라떼만 사갔지 아저씨와 별달리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는데 하루는 아저씨가 대뜸 물었다.


"요즘 언니는 잘 지내요?"


마스크에 패딩, 목도리까지 둘둘 말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모습이었는데, 눈만 보고서는 나를 알아보다니. 나는 이 카페 단골이지만 스몰토크에는 자신이 없어 지나가는 행인 1로 알아주길 바라며 그림자처럼 카페를 드나들기만 했었는데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신다는 것이 신기했다. 심지어 아주 가끔 언니와 함께 왔을 뿐인데 우리가 자매인지는 어떻게 알았담?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추운 겨울에 아이스라떼와 함께.

경희대학교 배트콩카페


처음엔 목이 칼칼한 것이 감기에 걸린 듯하여 몸관리 좀 해본답시고 뜨거운라떼를 시켰다.


"배트라떼 뜨거운 걸로 하나 주세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별안간 고개를 내밀며 "배트라떼는 아이스가 맛있는데"하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에서 "우리 집 손님이라면 제발 우리 가게의 맛있는 라떼를 최상의 상태로 마셔주세요"하는 아저씨의 속마음을 들어버렸다. 아저씨가 직접 블렌딩한 원두들이 얼마나 맛있고 향이 좋은지, 특히 굵은 설탕 알갱이가 바닥에 깔려 이를 씁쓸 고소한 라떼와 함께 홀짝홀짝 들이키는 순간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기에 나는 아저씨의 넛지에 단숨에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추운 겨울에 아이스라떼와 함께 이곳에 앉아 있다.






| 배트콩카페가 내게 의미하는 것_휴식


한 해 동안 회사도 두 곳이나 다녔고 운동에 미친 사람처럼 매일같이 헬스장을 갔으며, 지겹도록 광화문 교보문고에 출석도장을 찍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으며, 28살에 고3 수험생처럼 스터디카페를 드나들며 시험준비를 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나는 어떤 삶을 살 때 행복할까 고민했다.


굉장히 바쁜 일 년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불안했다는 것이다. 불확실과 변화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언제나 불안이 뒤따라온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그저 둘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는 관성이 붙어버리면 다시 한 발을 떼는 것이 어려움을 알기에, 그냥 계속 달리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에 공백이 생기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는 것처럼 계속 내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나에게 무언가를 집어넣고 꺼낼 때 나는 이곳, 배트콩카페에 왔다. 

2022년 배트콩카페에 숱하게 들락거리며 찍었던 사진들

그리고 이제 그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갔고, 나는 3월부터 소아과의사가 되기 위해 일 년 전 내가 자발적으로 나왔던 병원으로 자발적으로 돌아간다. 이제껏 다리가 아프면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게 된 거다.


그런데 '지금 배트콩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작년에 숱하게 배트콩카페를 들락거릴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의 나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 없어 끊임없이 물살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돛 없는 배의 노를 젓던 뱃사공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돛을 단 배가 바람결에 도착지에 도달할 것을 미리 알고 노를 젓는 대신 풍경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뱃사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착지의 뭍에 배가 닻을 내린 후에는 배를 정리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도착하기 전까지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도 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떤 부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_김영하 ⟪여행의 이유⟫


그런데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운 이 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배트콩카페에 왔다.


이전에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압박에 공부하듯 카페에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나는 이 카페에서 그러면서 휴식했던 것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것의 의미를 물어본다면 각자 다른 대답이 나오겠지만 순간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내 방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림'이다. 하지만 정작 오늘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5시간을 내리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다 보니 오히려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고 안 개꼈던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집에 가서 마지막 남은 2화를 보겠지만 말이다. 빵 먹으면서 봐야지) 그런 의미에서 올해에도 에너지가 방전되면 방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이곳을 계속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휴식의 의미


쉰다는 것의 의미는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육체적으로 지쳤다면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실제적으로 고된 몸을 피로에서 회복시켜 주어야겠고, 정신적으로 지쳤다면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즐거워할 수 있는 어떤 행위를 할 때' 회복할 수 있다. 즉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이 휴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생각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즐겁고 행복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 인지행동치료 중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즐거움 정도를 예상해 보고 실제 그 행동을 한 뒤 기분 정도를 다시 평가하여 이 둘을 비교해 보는 '만족예상판단표'라는 과정이 있다. 이것을 해보면 우리가 생각보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지 잘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기 전에는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지 않은 것들, 이를 테면 그저 밖에 나가 걷기나 책 읽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과 같이 사소한 행동들이 생각보다 기분을 좋게 해 주며 즐겁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오히려 하고 나면 소모적이고 기분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출처 : 데이비드 번스 ⟪필링굿⟫)


나는 올 한 해 무한히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짜릿한 순간도 있었으며 때로는 좌절하거나 깨지는 순간도 있었다. 낯선 것들을 끊임없이 접촉하며 불안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듯 낯선 것과의 접촉은 내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무언가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습관처럼 같은 카페에 가고 같은 라떼를 마셨던 나에게 이곳은 '휴식'이었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리] 여행에서 다시 일상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