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듣다가
공무원 시험엔 과락이 있다. 한 과목이라도 점수가 미달되면 다른 과목이 만점이라도 탈락이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모자란데 없이 무난한 사람이 필요한 공무원 조직의 특성 때문에 생긴 규칙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취지와 무색하게 요즘은 특별한 사람만 통과하는 시험이 됐지만.
2017년 3월 2일 날짜로 나란 사람을 테스트한다면 나는 몇 개의 과락통보를 받을까. 여유롭게 채점을 해도 많은 부분에서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것 같은데 ‘배려심’ 부분에서 과락이 확실하다. 아니 과락이 아니라 0점에 가까울지도. 일단 나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모습일 때 진심으로 행복한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거친 스케치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내 행복을 위해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탓이다.
나에 대한 배려보다 부족한건 타인에 대한 배려였다. 때로는 용서하기 어려운 일을, 때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는 ‘너 때문에’라는 말보다 ‘네 덕분에’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지만 차츰 ‘너 때문에’라는 소리만 늘어갔다. 왜 그랬을까. 내 마음이 어떤지 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행동까지 이해해줄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다음은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원장이 최근에 올린 글 중 일부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이해할만 하면 행동까지 이해해주곤 한다. 특히 자기와 관련한 일이 아닐 때면 쉽게 너그러워진다. 상대에게 공감할 요소가 있거나 나와 닮은 점이 있다면 너그러움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 마음은 이해해주지만, 그리고 용서도 할 수 있지만,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용서는 당사자가 하기 전에 남이 먼저 할 일은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지게 해야 한다. 그가 책임을 지면 그때는 위로하고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을 면제해선 곤란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겠다고 작심하며 살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왜곡되는 상황들로 힘겨웠던 시간이 어느 순간 나를 덮치고 내 모든 걸 쓸어버렸다. 서천석 원장의 말처럼 잠깐의 화를 모면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며, 책임질 일을 책임지지 않고 살았던 탓이다.
공무원 시험에 탈락하면 재시험을 1년 후에 치러진다. ‘배려’에서의 과락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데도 1년이 걸렸다. 길다면 긴 시간이며 언제 끝날지 모를 현재진행형의 시간이다. 마음 여기저기에 남은 생채기도 언제 아물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감사해할 수 있는 날도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는다.
작가 한강의 수필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의 수록곡이다. 수필집에 한강의 자작곡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묵직한 첼로소리와 여리게 떨리는 한강의 목소리가 위태한 앙상블을 이루며 수줍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간다. 위로가 필요할 때 자주 듣던 곡이다.
한강 –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안녕이라 말해본 사람
모든 걸 버려본 사람
위안 받지 못하는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
그러나 살아야할 시간
살아야할 시간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모든 걸 버렸다 해도
위안 받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지금 여기
이제야 살아야할 시간
살아야 할 시간
이제 일어나 걸을 시간
이제 일어나 걸을 시간
(누가 내손을 잡아줘요)
이제 일어나 걸을 시간
(이제 내손을 잡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