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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Mar 21. 2019

<캡틴 마블> N차 관람이 필요한 4가지 이유

#캡틴마블 #블랙팬서 #에일리언 #82년생김지영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솔직히 많이 놀랐다. 무려 1,723억 원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가 페미니즘, 난민 같은 진보적인 이슈들을 이렇게 매끈하게 엮어냈다니. 이것은 자본의 힘인가, 역량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충무로는 어디쯤 와있는가...  

하여튼 개봉 전 남초의 악다구니에 비하면 비교적 온전한(?) 영화라는 평가만을 듣고 들어갔는데, 공부 중인 페미니즘의 주요이슈들이 영화 전반에 선명하게 깔려 있어서 어리둥절했다. 페미니즘 영화 아니라며? 특히 기억에 남는 캡틴 마블의 대사는 두 개.


“너에게 증명할 것은 없어”
: 남성의 기준으로 여성을 평가하지 마라
“난 항상 통제된 상태로 싸워왔지, 내가 자유로워지면 과연 어떻게 될까?”
: 여성은 감성적인 존재가 아니며, 이성은 감성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주제를 응축하는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로 대놓고 페미니즘 이슈를 건드리는 작품인데 생각 외로 색이 옅다는 반응이 나온다면 둘 중 하나다. 알고도 모른 척 하거나, 워마드처럼 일부 레디컬 페미니즘을 전체로 확대하는 오류에 빠져살던가.


2.
<캡틴 마블>이 좋았던 다른 이유는 그간의 여성영웅과도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영웅 중 한 명인 <에일리언>의 리플리는 남성 영웅의 역할을 단지 여성으로 치환하는데 그쳤다. 영웅적인 일을 해냈지만 가부장제 사회를 파괴하거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균열을 내는 데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 탓도 클 것이다.


이 방식은 이후로도 가장 쉽게 채택할 수 있는 여성영웅서사로 남았다. 가장 최근작인 <원더우먼> 역시 모계사회의 리더라는 배경 아래 뛰어난 능력을 갖춘 여성영웅이 등장하지만 남성에 의한 억압을 벗어난다기 보다 개인적 각성에 치중해 아쉬움을 남긴다. ‘원더우먼’의 승리는 될 수 있어도 ‘여성’의 승리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캐롤 댄버스’는 다르다. 운전은 남자의 몫이라는 아버지의 질책, 여성은 뛰어난 군인이 될 수 없다는 남자 군인들의 조롱, 무려 1990년대에도 여성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전투기 조종사(실제인지 모르겠지만...)에 도전하는 모습까지. 생애주기에서 여성들이 부딪혀야 할 벽들을 보여주며 정면으로 맞서며 끝내 승리를 쟁취한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의 상업적 대성공과도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모두가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한 가지는 내 이야기라는 공감대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를 두고 온갖 악의적인 사례만 모아놓은 게 무슨 소설이냐며 소설 폄훼하는 사람도 있던데 둘 중 하나다. 알고도 모른 척 하거나, 개별적 사례들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개념을 도출하는 귀납법을 배우지 못했던가. 물론 하버드졸업생이라도 예외 없다는 게 비참한 현실이지만.


3.
사회적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블랙팬서>와 비교를 건너뛰기 어렵다. 사실 내 기준에서은 비교하는 게 <캡틴 마블>에게 미안할 정도다. 다음은 내가 <블랙팬서>를 본 뒤 떠오른 몇 가지 질문이다.


- 일반시민/여성 왕족에게는 왕위 도전 자격이 주어지는가?
- 정당한 승부를 통해 결정된 사항을 뒤집는 쿠데타가 정치적으로 인정되는가?


워프 따위는 우습게 하는 선진문명과 맞다이 뜰 정도의 과학기술을 가졌지만 ‘와칸다’가 그저 겉모습만 화려하고 자원빨로 버티는 원시 부족사회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과연 2편에서는 지울 수 있을까? 와칸다에서 민주화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 같다.


어디서였는지 까먹었는데 '최후의 불평등이 성차'라는 글을 최근에 읽었다. 인종, 난민 문제가 현재 남자들의 삶에 미치는 불편함보다 성평등이 훨씬 막대한 불편함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논지였다. 흑인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우리집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 빨래통 가득한 빨랫감이 줄어들지는 않는 탓이다. 생활과 유리된 정의를 부르짖기는 쉽다.


<블랙팬서>와 비교해 훨씬 완성도 높게 진보적인 가치를 다루지만 반응은 그만큼 열광적이지 않은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북미+월드와이드 흥행 20억 달러 돌파를 열렬히 응원하며 기회가 되면 재관람하겠다.


4.
커뮤니티를 많이 하다보니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을 하루에 몇번씩 보게 된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거의 유이롸게 맞는 말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특히 창작자라면 필수다. 뻔한 백인/남성/영웅서사에 모두가 만족하던 시대는 이미 갔다. 돈냄새라면 기막히게 맡는 디즈니 같은 회사가 그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유튜브로 혐오장사해서 푼돈이야 벌겠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왔다. 반박하려면 디즈니보다 거대한 미디어그룹을 만드는 수밖에. 제발 힘써보길 바란다.


카프카가 그랬던가. 진정한 예술은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수많은 도끼질이 이미 시작됐다. 마침 경칩도 지났다. 겨울은 봄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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