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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카피 Apr 03. 2024

045. 뱃속에서부터 널 사랑한 건 아니야

우린 언제부터 사랑하게 된 걸까?



친구가 첫 아이를 낳았다. 늦다면 늦은 나이에 만난 아기였다. 아이를 처음 마주한 소감을 묻는 내게 친구가 대답했다.

"보라색이어서 놀랐어."


난 내 아이들을 낳는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미 30년을 훌쩍 넘긴 삶을 살아온 어른과 이제 막 세상에 던져진 아이의 첫 만남. 뱃속에 280일을 품고 있었지만 내 몸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어떤 모습일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던 아이다. 피부로 느껴지는 발차기와 주먹질도, 초음파 사진으로 본 울퉁불퉁한 모습들도 익숙해졌다 싶었고 대충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된다 싶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몸 밖으로 나와 내 눈앞에 놓인 그 작고 젖어있고 붉기도 하고 조금은 보랏빛이기도 한 그 생명체는 실로 낯설었다. 진통 후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내 품에 안겨온 그 작고 초면인 그것은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어서 더욱 낯설었다. 낯선데 떨렸다. 그때의 감정을 무어라 정의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도.


어이룰 뱃속에 품고 있으면서 수 없이 되뇌었었다. 사랑한다, 소중하다, 기다린다 등등. 하지만 사실 280일의 그 모든 노력은 내 눈앞에 실제 놓인 생명체 앞에 무너졌다. 어쩌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이 작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책임감이 앞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너를, 그런 너를 나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되돌아보면 참 기가 막힌 인고의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엄마입니다 안녕하세요 딸입니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너와 나의 체취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너의 똥과 너의 먹을 것과 너의 씻을 것들을 걱정했던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허둥대던 그 시간들을 보낸 후 진심으로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 지금에서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얘야, 너를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널 사랑한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너의 울음과 웃음, 똥과 침, 아픔들을 부모인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넌 정말 큰일이 날 거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켜켜이 어떤 감정이 쌓였지. 처음에는 그 감정들을 책임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너를 향한 감정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너와 함께 자랐거든. 자라고 자라서 이제야 엄마는 네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사랑이라고 말이지."


육아가 힘든 시간인 이유는 내 아이를 더욱 사랑하기 위해 신이 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지고 볶고, 엎어뜨리고 매치고, 울고 웃고. 마냥 엄마니까 아이를 사랑해라 이런 얄팍한 감정이 아니라 많은 사건과 요동치는 일과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사랑에 이르는 시간. 


부모인 우리는 모두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사랑이 첫 만남부터 시작된 건 아니다. 작은 손을 잡고 또 놓아도 보고, 놓았더니 불안하고 다시 잡으니 안심이 되고. 아이를 안았을 때 그 작은 몸짓들에 놀라다가 의외로 센 힘에 또 놀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떼에 소리를 지르다가 자괴감에 빠져드는 수많은 밤을 보낸 후에야 우린 확신할 수 있는 거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심지어 너의 토와 똥을 맨손으로 받을 정도로 말이지. 


아이를 낳은 내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이가 울고 떼써서 미워도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고. 당연한 거라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또 익숙해지면서 그렇게 감정이 익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엄마가 되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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