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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May 26. 2023

길은 잃었지만 크로플은 맛있어!

"다음 역은 강남역"이라는 안내에 따라 부스스 눈을 뜬다. 아 두 정거장은 더 가야 하는 군. 안심하고 다시 눈을 붙이려는 찰나. 어라, 이 고소한 냄새는 뭐지?!…. 어디 누룽지 발냄새를 풍기는 멍뭉이가 있나 살포시 눈을 떠 주변을 살핀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무슨 냄새람.. 킁킁 거리며 홀린 듯 일어난다. 아직 잠이 덜 깨 사지를 휘적거리며 지하철에서 내린다. 터덜 터덜 천천히 계단을 올라 지하상가 쪽으로 나온다. 고소한 향내는 약간씩 더 진해지고 있었다. 뚜벅. 뚜벅뚜벅.. 발걸음이 이네 빨라진다.


‘킁... 이 고소한 냄새.... 킁킁...버터 냄새인 거 같은데.. 킁킁킁.. 어라 델리만쥬? 아님 와플인가??”


궁금한 나머지 최대한 코평수를 넓히려 코에 힘을 준다. 오백 원짜리는 무리여도 백 원짜리는 가능할 만한 크기다. 이런 나 자랑스럽다. 어깨 위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찰랑 가볍게 넘긴다. 훗.. 이제 후각을 내비게이션 삼아 꼬소한 버터냄새를 따라간다. 냄새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와플 굽는 냄새라는 더 강한 신호가 왔다. 그렇게 벌름대더니 결국 냄새의 근원지를 찾는다. '삐삐삐삐~ 도착지 주변입니다'. 코 네비가 알람을 보낸다. 발꿈치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곳이 눈에 띈다.


역시나 지하상가 모퉁이에 동그란 와플 팬들이 보였다. 지지직~~ 하는 맛난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이 흘러나온다. 다시 코를 크게 벌려 와플 냄새를 흠뻑 들이마신다. 너무 좋다. 냄새는 공짜니까. 이럴 때 마음껏 마셔둔다. ‘아 와플이 이렇게 고소했나’ 맛있는 기름냄새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투명한 진열대 안에 꽉 찬 반달 모양의 와플들을 보인다.



와플기계 특유의 네모모양이 찍여 있는 반달 모양의 와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와플이라고 하기엔 아주 얇은 결들이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루고 있었다. 또  끝은 바삭해 보여 페이스트리 같아 보였다. 아.. 반달.. 크로아상 모양의 와플... 혹시 이게 크로플인가?!! 한동안 유행했던 바로 그것?! 안 먹어봤다니까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서 왔냐고 무시당했던.. 아 그 크로플..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던 그것!


이제 나도 먹을 수 있겠다. 두둥실~ 마음이 벌써 동동 떠다닌다. 이때 전두엽의 냉철한 태클이 들어온다. 한번 먹으면 매일 먹는 거 아냐? 안 그래도 뱃살이 지금 두툼한데.. 흔들리는 뱃살을 한번 움켜쥐어본다. 다 잡히지도 않는다. 휴.. 먹어선 안 되겠지? 아냐 그래도 한 번은 먹어봐야지. 내 입맛에는 안 맞을 수도 있잖아? 그래 맛없으면 되려 입맛이 떨어져서 살이 빠질 수도 있어. 얼른 자기 합리화를 끝내고 재빨리 크로플 줄에 합류한다.


줄 마지막 부분에 서서 구경하는 크로플은 정말 신세계였다. 어쩌면 줄이 길어 다행이었다. 천천히 유리창 안으로 맛있는 크로플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으니.  빵 굽는 고소한 냄새를 실컷 맡으면서 크로플들이 잔뜩 진열된 걸 보니 절로 흥이 나고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크로플은 그냥 빵이 아니었다. 예술이었다. 겉으로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얇은 페이스트리의 결들이 수십 개의 층을 이뤄 그 속까지 바삭해 보였다. 크라상은 본디 밀가루 반죽을 아주 얇게 밀고 그 위에 잘 숙성된 버터를 올려 접은 다음, 다시 그 반죽에 또 버터를 올리는 과정을 되풀이해 만든다. 반죽과 버터를 같이 접은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반죽에 버터가 더 많이 스며들어 겉이 바삭해지고, 밀 반죽 속 글루텐이 강화돼 속살은 졸깃한 크라상이 연출된다.


겉에서 보기에 저 바삭함과 층층이 겹쳐진 페이스트리 결들은 최소 7-8번 이상은 접어 냉장 숙성시킨 잘 만든 반죽으로 크로플을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유리창에는 각기 다른 글씨체로 크로플 종류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붙여진 글씨대로 읽으면서 하나하나 자세히 구경했다. 프렌치, 누텔라, 브라운치즈, 올리브 바질 4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누뗄라였다. 평소 악마의 잼이라고 불리는 진한 헤이즐럿 맛 누텔라가 완전히 코팅되어 있어 크로플 모양의 초콜릿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을 잃고 구경하는 동안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4가지 맛 전부를 시켰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다가온 기회는 잡아야 한다! 크로플들은 맛있는 색깔인 주황색 상자에 들어있었다. 마케팅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 계열의 색깔은 뇌로 하여금 식욕을 자극하게 하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오호라! 그래서 버거킹은 주황, KFC도 빨강이구나. 심지어 맥도널드 삐에로는 머리는 주황색이고 온몸에는 온통 빨간색 줄무늬를 칠해놨다. 주황색 상자를 받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침이 슬쩍 나오고 입맛이 다셔졌다.



얼른 꺼내 프렌치부터 한입 ‘바삭’, 물었다. 크로플 결이 쪼개지는 가 싶더니 ‘촉촉’하고 쫄깃한 속살 때문에 쉬이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한 손으로 잡고 이빨로 당겨 끊었다. 코끝으로는 시나몬 향이 살짝 스치고 골고루 발라진 시럽에는 끈적한 달달함 느껴졌다. 치즈 자체의 고소함과 약간의 짭조름함을 맛보게 한 브라운 치즈, 뒷맛으로 따라오는 카라멜의 달콤한 풍미는 덤이다. 단짠단짠의 크로플. 그다음으로 맛본 바질향 크로플. 바질의 향긋함이 솔솔 묻어나는, 아니 엄청난 바질향으로 코가 찔리고 입맛이 돌며 뒷골마저 당기게 했던, 그 크로플은 말 그대로 바질에 압도당하는 맛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대했던 누텔라 크로플을 먹었다. 난 먹을 때  굉장히 치밀하고 계산적이다. 그래서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마지막에 먹는다. 훗. 늦게 먹으면 먹을수록 기다림의 행복까지 얻기 때문이다.  마치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릴 때처럼. 그 기다림의 시간들도 먹는 만큼의 기쁨이리라. 악마의 잼 누텔라를 한 됫박 부은 것 같은 크로플은 빵오쇼콜라(크루아상에 초콜렛을 넣어서 만든 페이스트리)를 와플기계에 눌러 찍은 맛 이상이었다. 악마가 인간을 살찌게 초코 잼 누텔라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이걸로 크로플을 만들었으니, 좁은 강남역 안에 인간들이 복잡 복잡 줄까지 서며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앞니 뒤에 눌어붙은 초콜릿까지 혓바닥으로 싹싹 긁어먹고 나니, 이제야 주변이 환해지면서 제정신이 돌아왔다. 여긴 어디? 아 늦었네…



사진출처: @roflerofl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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