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자동차 백미러로 수연은 상태를 점검했다. 눈밑이 휑한 게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만나자는 선미에 말에 덜컥 동의해 버렸다. 그리고서는 벌떡 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내연녀와 뭔 이야기를 해야 할지. 손톱살이 연한 분홍색이 될 때까지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만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리고 그에 맞는 답변을 떠올렸다. 내연녀와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연습하는 것이다. 수연은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몇 번이고 그 상황을 상상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두 고려해 시나리오를 짰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두면, 실제 상황에 맞닥뜨렸을 경우 일이 좀 더 수월하게 풀렸다. 일단 준비가 되어있으니 긴장이 덜 되었다. 상대가 수연이 예상한 질문을 한다면 대화는 화장지 풀리듯 술술이었다. 평소처럼 선미와의 대화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전남편 태호와 다시없을 사랑을 했다. 선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태호오빠가 그랬어요.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 임신 공격이었다고. 그런데 운 좋게 유산됐다고. 지금은 집안 눈치도 있고 재산 정리도 안 돼서 그냥 산다고. 곧 이혼할 거니 좀만 기다려 달라고요. 룸메이트로 생각한다고 했어요. 몸만 거기 가 있지 마음은 다 제게 있다고요. 전 그 마음 받아준 거밖에 없어요.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요? 간통죄도 없어진 마당에..
수연은 할 말이 없었다. 태호가 개새끼라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선미의 논리에는 앞뒤 빈틈이 없었다. 내연녀가 일승을 가져갔다.
착한 성격에 선미는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 눈물 콧물까지 다 짜가며 읍소를 할 수 있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제가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아니 처음에는 실수였어요. 눈 딱 감고 잊으려고 했는데. 또 자꾸 연락이 오고 그러니까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그렇게 딱 잘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고 하니까 아. 정말 죄송해요. 사실 마음은… 어떻게 한번 추스른 적이 었었어요. 그런데 어이없게 몸이 안 따라주는 거예요. 언니도 결혼도 하셨고 하니 아실 거 아녜요? 몸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마음은 별게 없었어요. 뭐 중독자도 아닌데, 찌릿찌릿하면서 자꾸 생각이 나니까 미칠 것 같은 거예요. 끊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제가 미친년 거죠. 진짜 죄송해요. 근데 제 사과받아주시는 거죠?
하.. 살인을 해도 정신병자는 금치산자이다. 이번에도 수연이 졌다. 여러 가지 대화가 더 떠올랐지만 말로 선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뭔가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 그랬구나. 하면 그만인 말들이었다.
이것 참.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도저히 혼자서는 안 되겠다. 수연은 구글을 켰다. 검색 키워드는 상간녀를 만나러 갑니다 였다. 여초 커뮤니티나 맘카페에서 대충 한번 훑었다. 다음은 불륜 척결 카페들에서 상세한 정보들을 찾아나갔다.
남편이 상간녀편을 들지도 모르니 남편과 삼자대면은 안된다. 증인이 있어야 하니 가능한 한 친구를 대동해라. 때린다면 맞고. 때릴꺼라면 폭행은 쌍방이 되게 할 것. 머리채 잡히지 않게 두건이나 헬멧 쓰기 등 여러 조언이 있었지만 두 가지 정도가 수연의 상황에 걸맞았다.
첫째는 불륜으로 받은 상처를 돈으로 보상받는 것이었다. 상간녀에게 불륜 자백을 유도하고, 그걸 증거로 위자료를 받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수연이 치사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불륜 피해자고 저 년놈들이 잘 못한 건데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또 이렇게까지 안 할 건 무엇인가? 두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피해자인 내가 왜 피해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지? 저들은 나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시끄러웠다.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서워서 똥을 피하는 게 아냐. 더러워서 그러는 거지. 소송하고 그러면은 막 잘못했다고 울고 빌고 찾아오고 귀찮게 할 거 아냐? 직장이나 가족들한테까지 막 그러면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변호사 써서 하면 되고 찾아오면은 접근금지 신청하면 되지. 근데 변호사는 어디서 알아봐? 태호네 쪽은 법무팀이 따로 있잖아. 거기서 역고소 들어오면 어떡해. 무고죄로. 소송하느라 돈 날리고 시간 쓰고 마음고생만 열라 하는 거 아냐? 아휴. 아서라 아서. 그냥 하지 마.
구더기 무서워서 지금 장 못 담가? 쫄 거 없어. 한다면 하는 거야. 변호사도 천천히 알아보면 돼. 로 톡 같은 데서 리뷰 보고 괜찮은데 정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나 홀로 소송해. 나도 아이큐 백은 넘어. 찾아올까 봐 무서워? 그럼 미국 이모네 가있어. 거기서 법률 대리인 지정해서 소송해. 찾아보면 다 방법은 있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거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몰라? 일단 해보자.
두 갈래의 길에서 수연은 정 가운데에 있었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결론은 모르겠다. 일단 선미를 만나보고 생각하자. 녹음은 해두고. 소송을 할지 말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두 번째 참고할 조언은 최대한 꾸미고 나갈 것. 절대 추레하게 보여선 안되고 할 수 있다면 외모에서 확실한 우위를 선점할 것. 외모로 기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수연은 일주일 만에 예뻐지는 법도 검색했다. 다이어트랑 피부과시술 주로 나왔다. 시술은 비용과 부작용이 염려해 패스했다. 일주일 동안 방울토마토와 양배추 그리고 닭가슴살만 먹었다. 하루 전날에는 백화점에 들러 옷을 사고 목욕탕에 들어 묵은 때도 벗겼다. 당일날 약속은 오후 세시. 토요일이라 오전에 헤어 메이크업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수연은 전날 밤 수수료를 물어가며 예약을 취소했다.
전날 밤 선미에게서 장소 확인을 위한 톡이 왔었다. 왜 이걸 이제야 봤을까? 싶게 선미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았다. 최근부터 지난 프로필까지 쭉. 선미는 셀카를 주로 올려놓았다. 나쁘게 말하면 넓적한 얼굴. 좋게 보면 둥그런 얼굴형이었다. 뚱뚱한 체형 아니 통통한 외양이었다. 흐릿한 이목구비에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흔한 얼굴 아니 평범한 외모였다. 이제 막 서른인데 짧은 파마머리는 선미를 늙어 보이게 했다. 아니 원숙미가 있어 보였다.
수연은 자꾸 선미의 외모를 깎아내리는 자기 판단을 정정해가며 사진들을 훑었다. 톡을 끌 때 그녀의 얼굴에는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네이버 예약을 켜 메이크업 샾을 취소했다. 순댓국도 시켜 주먹만 한 깍두기와 함께 원샷했다.
토요일 두시 오십 분. 늦으면 책잡히고 일찍 가면 할 일 없어 보일까. 제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가려고 수연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밀러로 마지막 화장을 점검했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초췌해 보이지도 않게. 제 걸음이면 딱 오후 세시에 맞춰 카페 앞에 도착할 것이었다. 이제 수연은 차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굳은 얼굴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15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