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전면이 통창인 카페는 안이 훤이 들여다 보였다. 오후 세시, 비스듬히 뉘어가는 햇살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카페 안은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수연은 힘주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앉아 있는 30대 여자를 찾았다. 세명 정도가 있었는데 선미의 프로필과 비슷한 느낌을 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언니 왔어?”
반가움이 묻어나는 톤이 업덴 목소리였다. 선미인가? 근데 초면에 나한테 반말을 한다고? 누구지? 뒤를 돌아보니 변지혜였다. 순간 네가 여기 왜?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용케도 침 삼키듯 꿀꺽 넘겼다. 남을 불편하게 하는 말은 안 하는 평소의 성격이 나온 것이었다.
지혜는 수연의 팔짱을 끼며 창가 쪽 테이블로 끌었다. 동글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흐릿한 여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한수연 선배님이시죠? 제가 선미예요. 아 성을 빼먹었네. 진선미요. 성까지 붙이면 좀 미스코리아스러워서 킄 크.. “
그녀는 입으로 손을 가리며 큭하고 웃었다. 명랑하니 밝아보였다. 오렌지빛이 도는 갈색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돋아나 있었다. 30대 같지 않았다. 말괄량이 소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얼떨결에 수연도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지 이 분위기는. 고작 인사정도에 할 말을 잃다니. 수연의 얼굴에 빗금이 쳐졌다. 당황했다. 다행히 지혜가 끼어들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게 몇 년 만이야. 흥국생명 다닐 때 봤나? 지수랑 같이? 기억이 안 나네. 근데 이렇게 셋이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다.”
오른 다리를 접어 왼다리에 올려놓으며 지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선배님 정말 반가워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완전 아싸여서 대 인싸인 수연선배님을 영접하게 될 줄을 몰랐는데. 워낙 학교에서 유명한 커플이었잖아요. 감히 가까이 갈 순 없고 멀리서 보기만 했죠. 뭐. 아니지. 구경했다고 해야 하나. 뭔가 연예인 보는 거 같았어요. 와! 태호선배다 와! 수연선배다 하면서 히히. “
볼이 발그레진 선미는 약간 신이 나 보였다.
“그 커플 너 때매 깨진 건 알고 하는 나불거리냐? “
지혜가 급발진했다. 왜 저래? 수연은 끼어들고 싶었다. 고구마를 백 개라도 먹은 것 같았다. 꽉 막힌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남한테 하고 싶은 말 좀 팍팍하면서 살 걸. 중요한 순간에 하려니까 안 나오네. 잘 못 살았네. 못 살았어. 자책감이 욱신욱신 가슴을 때렸다.
“너 되게 웃긴다. 니 일도 아닌데 니가 왜 나서? “
기다리라도 한 듯 선미가 바로 맞대응했다.
“됐고, 어서 상간녀 주제에 주둥이는 살아가지고. 잘도 씨부리네.”
지혜는 꼬나보듯 눈을 치켜뜨며 선미를 바라보았다. 유교걸 한수연이 머리채라도 잡나 싶었다. 구경이나 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허둥지둥 진땀까지 빼며 백여시한테 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꼴사나워서 한마디 한 것이었다. 첩이 첩질 못 본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네. 어이없다는 듯 지혜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뭐어?? 상간녀????”
선미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녀가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수연의 무릎 위로 왈칵 쏟아졌다. 수연은 얼른 휴지로 테이블 위의 커피를 닦았다. 휴지가 모질라 바지 위는 닦지 못했다. 이 와중에 휴지를 달라고 카운터로 갈 수도 없고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뭐 하고. 해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있었다. 찬기운에 무릎이 시렸다. 테이블이 작아서 나온 비극이었다. 애써 믿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려는 것도 병이구나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너 편입생 환영회 때부터 태호선배한테 반했잖아. 주식투자 동아리도 선배 따라 들어간거고. 수연선배랑 사귀는 거 알고 나서 동아리 그만뒀자나. 소리소문 없이. 너만 몰랐어. 티 다 났는데."
“하.. 은비까비 시절 얘기하고 있네. ”
어이없다는 듯 선미가 팔짱을 끼며 인상을 구겼다.
“삼 년 전이 무슨 옛날이야? 그냥 어찌어찌해서 그렇게 됐다. 죄송하다 사과하고 좋게 좋게 넘어가자. 옛날은 아니어도 뭐 다 지난 일이니까.”
지혜가 덤덤하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수건으로 수연의 바지 위를 눌렀다. 커피물이 하얀 면수건에 검게 물들었다. 수연은 새삼스레 다정한 지혜의 모습에 놀랐다. 더 놀란 건 본인이 태호랑 불륜사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선미의 반응이었다. 연락처를 준 지수가 말을 안 한 건지. 진짜 아닌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 뭘 좋게 넘어가? 어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 취급해? 전나 억울하네. 아니 오랜만에 만나서 왜 이러세요? 내가 지금 X도 없는 새끼랑 바람이라도 났다 이거야?”
무료한 토요일 오후, 싸움 구경을 하는 주변의 시선에 선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성은 계속 높아졌다. 심지어는 짝다리를 짚으며 삿대질까지 해댔다. 지혜 콧구멍까지 쑤실 기세였다.
지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그녀의 그림자가 선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기골이 장대해 평균체격인 선미를 압도하고 있었다.
“말을 가려가면서 해. 어서 욕지거리야?”
위협이라도 느낀 걸까 선미는 다소 의기소침해 보였다.
“무슨 욕은. 진짜 없다고 거기가. 아씨.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기침처럼 튀어나온 진실에 모두의 동공이 무차별적으로 흔들렸다.
“뭐?!”
첫소리는 수연의 입에서 나왔다. 비명과도 같았다.
“그리고 내가 만난 건 태호 선배가 아냐. 태호 선배 형이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선미가 말을 덧 붙였다. 될 되로 대라 라는 표정이었다.